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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불호는 유한함에서 기인된다
먼저, 호불호에 관한 한 가지 대전제와 함께 글을 열어보겠다. 우리가 호불호를 논한다고 가정할 때, 대개 선택과 판단의 기로에서 기인됨을 전제 조건으로 둔다. 이를테면, 오후 일정을 시작하기 전 점심시간에 무엇을 먹고 싶은지, 무엇을 먹어야 탁월할지, 혹은 무엇을 먹었을 때 맛이 없었고, 속을 불편하게 했는지 같은 기준을 기저에 두고 가장 적절한 판단을 내리려고 하지 않는가. 그렇게 내린 결단은 되돌릴 수 없기에 다소 신중하다. 지금 현재도 찰나가 되어 끊임없이 과거로 흘러가고, 사건은 다시 이전 시점으로 반복되지 않는다. 우리의 삶 속에서 시간은 유한적이기에 고귀하고도 유일무이하다. 반대로 말하자면, 시간은 한계를 지니며 언제나 불가능성을 함께 품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터무니없는 가정을 해보자. 우리가 끝없는 시간 속에서 영원한 삶을 향유할 수 있다면, ‘선택’이라는 개념은 없어진다. 다시 말해, 영원성은 ‘언젠가 가능하다’는 전제를 수립할 수 있기 때문에 불가능성에 대해 논할 이유도 없어진다는 것이다. 영국의 물리학자 겸 철학 교수 딘 리클스(Dean Rickles)는 자신의 저서 『인생의 짧음에 관하여』(을유문화, 2024.06)에서 “무제한의 시간은 모든 가능한 결과가 어느 시점에 일어날 수 있음을 의미하므로, 선택은 일관성 있는 개념조차 되지 못한다”라고 말했다. 이 말인 즉슨, ‘시간이 무한하다’는 가정이 생긴다면 우리가 좋거나 싫다고 판단한 선택의 가치에 의미나 특별함도 옅어진다는 것이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본다면, 우리 삶은 앞서 서술했던 과도한 반사실적 가정과 달리 당연하게도 유한하다. 지금 이 순간 주어진 삶의 제약(공간, 시간, 기회, 자원, 죽음)이 곧 선택과 판단을 강요하게끔 촉발시키는 실존적 반응이며, 이윽고 취향과 호불호를 형성하는 방아쇠라는 것이다. 물론 모든 사람들이 충분한 선택지를 가진 것은 아니다. 이를테면 가난한 환경에서 태어났거나, 선택의 여지가 없는 상황에 지속적으로 노출되는 사람들에게 호불호의 형성이란 무척 가혹한 이야기일 수도 있다. 나아가 비교적 나은 환경을 향유하는 인물이 취향과 호불호를 갖는다고 한들, 그 선택엔 반드시 선천적인 영향이 개입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에서 억만장자라 해도 모든 것을 할 수 없으며, 죽음이라는 필연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인간은 시간·공간·상황·경험의 제약 속에 놓인 존재일 수밖에 없으며, 우리가 사는 세상은 여전히 해결할 수 없는 불가능성으로 가득하다. 결국 호불호의 가장 깊숙한 근원은 부나 권력 같은 외부 조건이 아니라, 누구도 벗어날 수 없는 유한하고 불완전한 삶의 조건 속에서 비롯된다. 다시 말해, 호불호는 각자에게만 주어진 고유한 감각이면서 동시에 인간 모두가 공유하는 보편적 경험인 셈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선택은 언제나 각자가 처한(혹은 공통으로 직면한) 한계와 불가능성을 저변에 두고 적절함과 의미를 찾는 것이어야 한다. 옳고 그름의 윤리성 혹은 당위성을 예외로 둔다면, 그다음의 기준은 호불호의 영역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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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불호는 시간의 문제다
우리가 무엇을 좋아한다거나 싫어한다고 언급할 때 어떤 근거를 내세울 수 있을까? 다양한 기준이 있겠으나, 필자는 호불호를 언급한 당사자가 그 대상에 얼만큼 그리고 어떻게 시간을 할애하고 있는지가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판단한다. 다시 말해, 우리가 무언가를 진정으로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는 강한 근거는 ’살면서 내가 그것에 얼마나 몰입된 시간을 쏟고 있는가‘에 있다. 영화를 진정으로 좋아한다면 차마 시간 내서 즐기지는 못하더라도 관련 정보를 꾸준히 스크랩 할 것이며, 운동을 진정으로 좋아한다면 하루 스케줄 중 30분 만이라도 운동하는 시간으로 빼둘 것이다. 혹은 좋아하는 대상과 관련된 정보로 자신의 휴대폰과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을 것이다.
반면 ‘싫어한다’라고 말할 수 있는 강한 근거는 ‘얼마나 외면하려 하는가’에 있다. 좋지 않은 경험이나 감정이 몸과 정신에 깊게 뿌리내려 있기에, 사람은 그것을 어떤 방식으로든 떠오르지 않으려 크고 작게 몸부림친다. 혹은 ‘철저한 무관심’의 형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노력조차 낭비라 여기며, 아예 관심의 대상에서 지워 버리는 것이다.
결국 본질은 투자한 시간의 많고 적음이 아니라, 한정된 시간 속에서 내가 어떤 순간에 몰입했고, 무엇을 선택했으며, 무엇을 외면하거나 무심히 흘려보내려 했는지를 스스로 인지하는것이다. 스스로 가장 많이 투자하고 있는 시간의 대상이 무엇인지 유심히 되짚어본다면, 내가 진정으로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대상이 무엇인지를 보다 명료하게 인지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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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불호는 삶의 애정이다
20대의 얘기를 잠시 꺼내보겠다. 필자는 20대 중반에 들어선 25세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지금도 일부 마찬가지지만 내 주변에서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모르겠다‘고 고민하는 경우를 꽤 많이 봐왔다. 필자도 20대 초반 즈음엔 특정 대상에 대한 호불호를 이야기할 때, 그 이유가 얕고 직관적일 때가 많았다. 음식이든 콘텐츠든 크게 생각해 본 적도 시간을 들여본 경험도 없던 탓에 간단한 부연 설명도 덧붙일 수 없었다. 누군가가 ‘그게 왜 좋아?’ 혹은 ‘그게 왜 싫어?’ 라고 묻는다면, 머릿 속에 맴도는 건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두루뭉술한 감각과 ‘그냥…‘ 이라는 워딩 뿐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와 동시에, 당시 동 나이대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진정으로 좋아하는 분야에 한해선 전문가처럼 쉴 새 없이 떠드는 사람도 상당히 많이 겪어봤다. 필자 역시도 좋아하는 분야에선 하고 싶은 말이 끝없이 터져 나오고, 관심사가 통하는 친구들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대화했다. 그러나 이를 반대로 말하자면, 특정 몇 가지를 깊게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은 잦게 목격해왔지만, 보다 넓은 영역에서 자신의 주관을 심어놓은 사람은 손에 꼽게 봤다는 이야기다.
골똘히 고민해 보았다. 상술한 ‘호불호의 영역’이 넓고 깊은 사람들을 드물게 경험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물론 연령대를 막론하고도 희귀할 수도 있고, 단순히 필자의 인간관계에서 비롯된 경험적 한계일 수도 있다. 다만 비슷한 나이대에서 겪어봤던 손에 꼽는 사람을 상기시켜보면, 형태는 다르지만 이들을 관통하는 굵직한 공통점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이는 삶과 세상을 대하는 태도가 애정 어리다는 점이었다. 그들은 경험하는 것을 크게 두려워하지 않으며, 지식을 쌓는 것을 좋아했다.
이는 특정 영역에 국한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장르를 망라하는 거의 모든 것이 그들이 선택한 대상의 범주였다. 따라서 세상 만사에 대한 이해도가 높았으며, 그만큼 좋아하는 것도 많고, 싫어하는 것도 명확했으며, 나아가 사상이나 가치관도 선명했다. 그들이 이렇듯 세계에 관심을 갖는 이유나 목적까지는 유추할 순 없지만, 적어도 확실한 건 그들은 언제나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도처를 바라보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도처에 있는 거의 모든 것을 관찰한다. 그리고 외면하기보다는 파고들기를 선택한다. 그들 스스로가 발 딛고 있는 이 세상을 향해 시간을 끊임없이 쏟고 있는 것이다.
혹자는 그것이 대체 무슨 쓸모가 있냐고 반론할 수도 있다. 가령 오늘 습득한 정보가 그다지 나에게 실질적인 효용을 주지 못하거나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되려 시간 낭비 아니냐는 것이다. 나는 호불호의 실용적 측면이나 효용 가치에 대해서만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중요한 건 쓸모의 유무 보다도 호불호의 범주 자체를 넓히는 일이다. 몇 가지의 특정 호불호에만 기대고 무감각할 것이 아니라, 논할 수 있는 대상과 이유를 늘려가야 한다.
좋고 싫음의 기준이 명확하고 충분한 설득력을 지니고 있을수록, 후회 없는 선택과 판단으로 이어질 확률이 높아짐을 의미한다. 좋고 싫음의 기준을 논할 수 있는 영역이 넓을수록, 단 한 가지의 대상만을 놓고 이야기하더라도 훨씬 종합적인 견지에서 비롯된 폭 넓고 깊이 있는 대화를 이끌 수 있다. 가령 미술 작품을 놓고 이야기할 때, 작가가 행한 기술적 면모나 묘사된 직관적인 아름다움만 이야기하는 것은 논의가 한정적일 수 있다. 작가가 옹호하거나 비판하고자 선택한 역사적, 사회적, 정치적, 철학적 담론과 영향받은 문학, 음악, 영화 같은 타 장르까지 다각도로 고려할 수 있다면, 할 수 있는 이야기는 말 그대로 무궁무진할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 무궁무진함이, 삶의 해석력을 풍부하게끔 해주는 거대한 자양분이다.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야와 해석력이 ’해상도’라면, 다양한 맥락으로부터 습득한 경험은 ‘픽셀’과도 같다. 해상도는 한정된 규격 안에 얼만큼의 픽셀이 조밀하게 들어가 있느냐에 따라 비례해 증감한다. 단순히 주어진 시간의 많고 적음이 문제가 아니다. 우리가 가진게 유한한 생이라 할지라도, 그 안에서 ‘적절함’ 내지는 ‘호’와 ‘불호’를 논할 수 있는 여지가 많고 넓을수록 그만큼 우리의 삶을 이루는 많은 요소들이 풍부해질 여지도, 수많은 선택과 판단의 기로에서 보다 현명해질 여지도 많아진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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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호불호에 관하여
다소 총론이 길었다. 필자의 직접적인 경험에서 비롯된 예시를 각론으로서 서술해 보겠다. 필자의 경우는 호불호의 영역이 넓은 축에 속하는 것 같다. 기본적으로 철학이나 역사, 혹은 미제 사건에 관해 호기심이 많은 탓이다. 축구와 음악, 가구도 개인적으로 정말 좋아하는 분야인데, 좋아하는 분야라면 그 분야의 철학과 역사를 조금이나마 살펴봐야 직성이 풀린다. 물론 이것이 결코 지인들에게 유려하게 설명할 만큼 이해가 깊다고는 단언할 수는 없지만, 특정 한 분야의 철학이나 역사를 들여다보면 정말 다양한 정보를 접할 수 있어 유익하다. 이 유익함이 나의 호기심을 해소해 주고 호불호를 확립하는데 큰 도움을 준다. 그저 주관적인 경험에 의거한 이야기지만 도움이 될까 싶어 예를 들어보겠다.
이탈리아 국적의 안드레아 피를로(Andrea pirlo)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축구 선수다. 내가 이 선수를 좋아하는 이유는 장발과 긴 수염을 휘날리며 간단 명료하지만 유려한 기술을 구사하는 축구를 통달한 도사 같은 면모의 외견도 있지만, 딥 라잉 플레이 메이커(Deep-lying playmaker) 혹은 레지스타(Regista)라는 수비형 미드필더의 특정 포지션 롤에 큰 매력을 느껴서도 있다. 피를로는 본인이 팀의 중심이 되어 그라운드 위의 지휘자와 같은 역할을 수행했고, 실제로 피를로의 선수적 별명은 마에스트로(Maestro)였다. 그저 골대를 향해 전진한다는 목적만을 지닌 축구라는 투박한 스포츠를, 오케스트라를 이끌듯 잠시나마 예술의 경지로 이끈 그 모습을 본 나는 차마 매료될 수밖에 없었다.
이 선수로 인해 이탈리아라는 국가에 관심을 갖게 됐고, 이는 이탈리아 축구 역사, 나아가 전체 축구 역사로 확장되었다. 또 피를로의 포지션 롤에 매료됐었던 나는 축구 전술사에도 관심을 갖게 됐다. 모든 장르가 그렇듯, 축구 역시도 그 역사 속엔 당연히 시대적 배경(1939-1945년 세계 2차 전쟁, 당시의 이데올로기, 문화, 국가 및 인종 차별 등)이 유기적으로 연관되어 있고, 각 시대를 풍미한 선수마다 갖는 내러티브도 제각각이라 다양한 국가적 문제나 문화에 대해서도 익히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이 맥락을 접하고 다시금 ‘피를로’라는 선수를 바라보았을 때, 좋아하는 것과 별개로 인식하지 못했던 영역을 이해할 수 있었다.
레지스타(Regista)라는 역할의 어원이 이탈리아어에서 비롯되었고, 본래 이탈리아는 르네상스 이후 예술, 음악, 오페라의 본고장이었기에 하나의 무대를 전체적으로 조율하는 ‘지휘자/연출자’ 개념이 뿌리깊었다. 또 이탈리아는 역사적으로 도시국가의 모자이크였고, 강력한 중앙집권보다는 각 지역을 잇는 조율자/중재자가 필요했었다. 다시 말해, 축구에서도 중앙에서 질서를 세우는 조율자(레지스타)의 존재는 분절된 것들을 하나로 묶는 이탈리아적 사고와 어쩌면 평행선에 놓여 있다고 볼 수 있었다. 피를로라는 선수가 수행하는 레지스타(Registar)라는 역할이, 조율과 지휘를 중시하는 이탈리아의 역사 문화적 DNA와 긴밀히 맞닿아 있는 것이다. 이것이 내가 나아가 이탈리아라는 국가와 문화를 더욱 좋아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한 명의 축구선수로부터 시작된 이야기는 이윽고 정말 많은 가지가 뻗쳐 나가 ‘인식의 확장’을 열어주었고, ‘다른 영역으로의 관심 전이’를 이끌어 낼 수 있었다. 이는 피를로를 처음 접했던 중학교 1학년부터 20대 중반이 된 지금까지 누적된 시간이었다. 차마 모든 내용을 다 적을 순 없겠지만, 이렇듯 호불호의 형태로 이어지는 일련의 선택과 판단들이 결국 꾸준히 축적되어 ‘나’라는 사람의 호불호, 나아가 ‘나’의 자아와 가치관, 정체성 등을 풍부하게 확립시켜주는 좋은 자양분이 되었음을 전하고 싶다. 이것만으로도 우리가 기꺼이 시간을 들여 도처에 있는 거의 모든 것들을 관찰하고 생각하며, 자신의 호불호를 확립해 나가야 할 당위에 대한 설득력을 갖고 있다고 본다. 어쩌면 이는 호불호의 쓸모를 논하고자 하는 염세적인 반론을 향한, 강한 카운터 어퍼컷이 될 수 있는 또 하나의 내용이 될 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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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불호는 선택의 미학이다
호불호는 분명히 취향의 문제에서 그칠 것이 아님에 틀림없다. 호불호는 생성되기까지 생각보다 까다로운 조건을 지니고 있다. 때로는 너무나 회색 지대와도 같은 그 미묘한 차이에 호와 불호를 나누기 무척 어려운 상황을 직면하기도 한다. 물론 언제나 최적의 상태를 추구하거나 유지하기란 무척 어려운 일이라는 건 잘 알고 있다. 우리는 호불호로 인해 타인으로 하여금 설득을 강요하거나 강요받기도, 때로는 갈라서게 되기도 하니까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가피한 상황 속에서 혹은 모종의 목적을 위해 현실을 타협하는 한이 있더라도, 그렇게 마음속 깊은 어딘가에서 뜨겁게 올라오는, 본능과 비슷한 무언가는 단연코 진실을 말하고 있음을 스스로가 가장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 인과가 어디서부터 기인되었든 간에, 인간은 결국 좋아하는 것을 쫓게 되어 있으니깐 말이다.
나는 근래 무엇을 좋아했고 외면했나.
미처 인지하지 못했었던 호불호의 영역을 발견했는가.
충만하고 행복한 삶의 전제는 더 많은 시간이 아니라 주어진 시간의 흐름 속에서 갖는 가치 판단에 있다. 우리는 끊임없이 목적에 부합하는 적절함을 향해 선택하고 또 선택할 것이다. 호불호는 이토록 다시는 오지 않을 고귀한 시간을 헤프게 쓰지 않기 위한 선택의 미학이다.
앞서 많은 말들을 했지만, 아무렴 어떠한가. 지금 이 순간에도 흘러가는 유한한 시간 속에서, 무엇이라도 경험하며 조금이나마 더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들을 찾고 채워가는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하지 않는가. 이윽고 나를 구성하는 조각들을 바라보며 남은 삶 동안 무엇을 해야 하고 채워나가야 할지 골몰하는 것, 이를 멈추지 않는 것. 그것이 바로 삶을 대하는 진심 어린 애정이자 책임일 것이다.
소중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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