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떻게 가난에서 고급 취향으로 이주했는가

1.

우리가 가진 호불호가 정말 나의 선택으로만 이루어졌을까? 단호하게 대답하고 싶다. 절대적으로 아니라고. 나는 쥐가 나오고 인터넷이 잘 잡히지 않는 집에서 살았고, 버스비가 없어 학교까지 한 시간을 걸어 다녔으며, 울산에서 인천으로 유학을 오기 전까지는 제대로 된 패딩조차 없었다. 그 환경 속에서 온전히 나만의 선택으로 취향을 가지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버스비는 커녕 병원도 제대로 가지 못하는 상황은 내가 좋아하는 캐릭터의 양말을 구매하기 위해 2,000원을 쓰는 것마저 주저하게 만들었다. 양말에 대한 나의 취향, 호불호를 알기 위해서는 우선 여러 종류의 양말을 구매해서 신어보는 것이 중요하다. 가장 저렴한 양말부터, 5,000원짜리 레이스 양말이든, 스포츠 브랜드에서 나오는 두꺼운 양말이든, 종아리까지 올라오는 니삭스든. 돌고 돌아 내 선택이 쿠팡에서 10켤레 8000원에 파는 저렴한 양말일지라도 이 선택은 돈이 없어 이 양말밖에 선택지가 없는 상황과는 다르다. 나는 나의 취향 성립을 위한 여러 선택지가 있는 상황이 아닌 현실에 맞는 선택지 단 하나만 주어진 상황에서 자랐다.

2. 

무사히 인천으로 유학을 오고, 서울 4년제 대학 입시에 성공하며 어린 시절 내가 위치하던 궁핍한 하위 계층이 아닌 보다 높은 계층에 무사히 편입했다. 대학을 다니며 나를 수치스럽게 만들었던 것은 다름 아닌 내가 가진 저급하다고 여겨지는 취향이었다. 또한 그중에서 나를 가장 창피하게 만들었던 것은, 내가 가지고 있는 취향이 키치한 것을 선택했다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고급’을 모르기 때문에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저급’한 것들만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이었다. 무사히 기득권에 편입되었기 때문에 나는 태초부터 기득권이었던 것처럼 보이는 이들과 ‘잘’ 어울리고 싶었고, 그래서 그들의 ‘고급 취향’을 나도 가지길 바라며 무작위로 취향을 향유했다. 잘 알지도 못하는 클래식 공연이나 발레 공연을 보러 가서 2시간 동안 이해하지 못한 것을 티 내지 않으려고 시니컬한 태도를 꾸며내기도 하고, 코스타리카니 에티오피아니 하는 원두를 알아보고자 엇비슷한 쓴맛이 느껴지는 커피를 마시다가 포기하기도 했다. 돈이 없어 여행지에서 쫄쫄 굶느라 6kg이 빠져서 귀국하기도 했지만 무리하며 해외여행을 다닌 적도 있다. 결론적으로 이 모든 노력은 내 취향 형성에 큰 도움을 주긴 했다. 하지만 그 노력이 계층 상승을 위한 학습에 가까웠다는 것을 생각해 봤을 때, 취향이 과연 진정 내 선택으로만 이루어졌는지는 다시 한번 생각해 볼 여지가 있지 않을까?

나는 내가 가지고 있는 취향이 모두가 쉽게 향유할 수 있는 ‘저급’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1949년 LIFE 지에는 취향의 고급과 저급을 나누어 놓은 차트가 수록되어 있다. 표에서 고급에 가까운 취향일수록 더 비싼 가격이 붙는다. 발레 공연을 보러 가는 것은 한 장에 12만 원가량의 티켓을 구매해야 하지만 서부극을 보는 것은 TV 채널에서 방영하는 토요 명화를 통해 무료로 볼 수 있다. 모든 사람이 쉽게 향유할 수 있는 취향은 ‘고급’이 될 수 없다.

이러한 취향의 고급과 저급은 비단 과거의 인식이 아니다. 현재에도 우리는 취향의 고급과 저급을 나누고 있다. 누가 어떤 옷을 입었는지, 더 구체적으로 어떤 아우터를 걸쳤는지, 그 컬러가 어떠한지, 그냥 빨간색인지 레디시 브라운인지. 우리는 이것을 ‘미감’으로 퉁쳐서 이야기하지만 사실 이건 ‘취향’의 또 다른 말이기도 하다. 솔직하게 이야기해 보자. 믹스커피를 마시는 사람과 브라질 빈할 레드그레이프를 드립커피로 내려 마시는 사람을 상상했을 때, 믹스커피를 마시는 사람을 저급 취향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지는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적어도 원두 이름을 하나하나 알고 선택하여 먹는 사람을 보며 우리는 고급진 취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좋은 취향, 고급 취향은 자본이 만들어낸 산물이다. 선택지를 다양하게 경험할 수 있는 자본, 그것을 학습할 시간적 여유가 필요하다. 믹스커피와 브라질 빈할 레드그레이프를 모두 마셔본 사람만이, ‘고급진 취향’을 가질 수 있다.

3.

대학생, 특히 서울 4년제 대학을 재학 중인 대학생은 기득권이다. 기득권은 절대적인 기준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고정된 것처럼 보이는 사회 최상위 계층만 기득권이라고 볼 수 없다. 기득권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모든 남성은 모든 여성보다 기득권이다. 수도권에 사는 사람은 인구 10만이 되지 않는 지역에 사는 사람보다 기득권이다. 똑같이 가난하더라도, 노인보다는 청년이 더 기득권이다. 이처럼 기득권은 상대적이다. 서울 4년제 대학에 재학 중인 학생이 가난한지 부유한지를 떠나서 그들은 사회 최상위 계층에 편입될 가능성이 높다. 또한 서울에서 대학을 다닌다는 것 자체가 하나의 특권이다. 학비를 감당하고 생활할 수 있는 경제적인 여유가 있다는 사실이고, 그런 경제적인 여유가 없더라도 서울이라는 대도시 속에서 얻을 수 있는 인적 네트워크, 문화적 경험, 정보 접근성 등은 서울이 아니라면 얻기 힘들었을 특권이다. 단순히 가난한 서울대생과 부유한 지방대생을 비교했을 때, 누가 더 기득권인가? 우리는 답을 안다. 

4. 

출처는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391155

또한 취향은 그 취향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 따라 평가가 나뉜다. 세상의 통념 속에서 고급 취향이라고 할지라도 그 취향을 가진 사람이 우리의 인식 속에 낮은 계층이라면 그것은 더 이상 고급 취향으로 인식되지 않는다. 새벽 5시에 버스를 타고 어디론가 출근하는 아주머니들을 생각했을 때, 그들이 입고 있는 형형색색의 경량 패딩은 촌스러운 취향이다. 하지만 만약 청담동 고급 아파트에 사는, 이른바 ‘사모님’이 그런 형형색색의 경량 패딩을 입는다면? 그것은 더 이상 촌스러운 형형색색의 경량 패딩이 아니라, 기능을 중요시한 원색의 아우터가 될 것이다. 이런 인식의 변화는 자연스러운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새벽 5시 버스에서 보는 아주머니들의 선택지에 비싼 값의 다른 아우터가 있지 않다는 걸 알고, 청담동 고급 아파트에 사는 사모님의 선택지에는 비싼 값의 다른 아우터가 있지만 ‘그럼에도’ 그런 경량 패딩을 선택했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기 때문이다. 

5. 

하지만 가장 모순적인 것은 내가 성공적으로 기득권에 편입한 후 만난 수많은 사람은 스스로를 가난하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그들이 ‘진짜’ 가난했는지, ‘가짜’로 가난했는지 판단할 수 없지만 적어도 내가 바라보는 그들은 스스로를 가난한 상황에서 자란 사람으로 프레이밍 하기엔 어폐가 있어 보였다.

‘개천에서 용 난다’는 과거에는 가능했어도 현재에는 실현 불가능한 판타지이다. 더 이상 개천에서는 용이 나지 않고, 이무기가 새로운 용이 되고 있다. 이무기가 아니라더라도 뱀이라도 되어야 용이 될 가능성을 얻는다. 우리는 개천은 여전히 개천이고, 용은 시간이 흘러 새로운 용을 낳는다는 사실을 알지만 ‘개천에서 용 난다’는 판타지를 포기하지 못하고 있다. 포기되지 못한 판타지는 개천에서 새로운 용이 날 수도 있다는 희망을 넘어서 이무기로 태어난 내가 사실은 개천에서 나온 용이라는 착각에 빠지게 만든다.

우리는 왜 개천에 집착할까? 가난이 좋아서? 사실 그들은 ‘가난’이 좋은 것이 아니다. 그들은 가난의 ‘이미지’를 동경한다. ‘가난’한 사람은 성실하다는 인식, 그 누구도 착취하지 않았을 거라는, 오히려 착취당했을 것이라는 동정 어린 시선, 그러므로 그들의 성취는 다른 외부의 도움이 없이 오로지 순수한 노력으로 이루어졌을 것이라는 판단. 우리는 그런 이미지를 동경하고 가지고 싶어 한다. 내가 이루어낸 모든 성취가 온전히 나의 노력만으로 이루어진 성취라는 것을 인정받고 싶어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온전히 ‘노력’만으로 이루어진 것일까? 입시를 하기 위해 다녔던 모든 사교육에 대한 경제적인 배경, 지방의 사교육이 아니라 수도권이라는 더 좋은 인프라 속에 존재하는 사교육을 받을 수 있었던 지리적인 배경과 같은 것을 무시할 수 없다. 개인의 성취를 ‘노력’이 부재하고 상황적인 우위를 점했기 때문에 이룬 성취라고 폄하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상황적인 우위를 점했기 때문에 노력하기 쉬웠던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이런 상황 속에서 우리가 개천에 집착하는 것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 모든 특혜를 부정하고, 가난의 현실은 무시한 채, 가난의 이미지만을 소비하는 것이다.

6.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고 있는 우리 모두는 기득권이다. 나 또한 가난했던 과거를 뒤로 하고 성공적으로 기득권에 편입했다. 어떻게 보면 계층이동에 성공한 것이다. 성공적으로 상위 계층으로 편입하면서 가장 크게 기대했던 것은 지긋지긋한 가난 이야기, 이른바 불행 배틀을 더 이상 듣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이곳에서는 다른 층위의 가난 이야기가 진행되고 있었다. 그들은 ‘누가 누가 가난을 잘 훔치나’ 배틀에 심취한 상태였다.

출처는 한국장학재단 / Ⓒ 김해영 의원실

서울 4년제 대학에 진학 중인 학생 중 수치상으로 가난한 가정의 자녀가 얼마나 소수인지는 이미 많은 통계로 입증되어 있다. 그 소수의 학생이 이상하리만큼 미술대학에 몰려있는 것이 아니라면 내가 만난 가난하다고 이야기하는 대부분의 사람은 사실은 그다지 가난하지 않다는 판단을 쉽게 내릴 수 있다. 또한 미술대학 입시를 생각했을 때, 과할 정도로 비싼 사교육비와 학비를 감당했다면 가난하지는 않았을 것이 어렵지 않게 예측 가능하다.

실제로 나는 학교에서 만난 동기가 자신은 가난한데 왜 한국장학재단에서는 본인을 9분위로 판단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그 동기는 동시에 본인이 교육자인 부모님 밑에서 자랐으며 가족이 사는 집은 자가라는 사실도 이야기했다. 아이러니하다. 비단 그 동기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수많은 전문직, 관리직에 종사하는 부모님의 밑에서 자란 사람들이 본인을 ‘개천 용’이라고 말한다. 자신은 가난한데 사회가 인정해 주지 않으며, 자신이 이룬 성취는 온전히 자신의 노력만으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말이다. 이쯤 되면 그들은 정말로 본인이 가난한지 부유한지에 대한 사실 판단을 받고 싶다기보다는 가난해 보이고 싶어 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정정한다. 그들은 가난해 보이고 싶은 것이 아니다. 그들은 타인이 본인을 가난한 상황에서 온전히 본인 노력만으로 성취를 이루어낸 대견한 사람으로 봐주면서도 신기하게 ‘빈티’ 나지 않는 사람으로 보이길 바란다. 

7. 

취향은 자본주의의 허상이고, 계급의 산물이다. 가난한, ‘저급’ 취향을 가졌던 입장에서 이 사실만으로도 굉장히 서럽다. 내가 삶을 살아내기 위해, 취향을 우선순위로 두지 못해서, 결국 내가 가진 것이 ‘저급’하다는 사실은 때때로 나를 절망하게 만든다. 내 가난을 동경하고 그것을 결국 모방하여 빼앗아 가는 이들을 보면서 가진 게 많으면서 가난까지 빼앗아 간다는 분노가 생긴다. 자신은 가난했다고 이야기하는 것. 본인의 취향은 그 속에서 온전히 내 선택만으로 이루어졌다고 이야기하는 것. 내가 가진 ‘저급’ 취향은 그러므로 온전히 내 선택이라고 말하는 것을 듣다 보면 현실을 인지하지 못하고 말을 하는 것은 얼마나 쉬운지 비아냥거리게 된다. 적어도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이들은 가난에 대해 이야기할 자격이 없다. 가난의 이미지를 본인에게 씌울 자격 또한 없다.

 내 취향은 정말로 나의 선택만으로 이루어져 있는가? 내 취향이 무시당하지 않는 것은 정말 내 취향이 좋기 때문인가? 내 취향과 노력을 합리화하기 위해 나는 내가 가진 특혜를 의도적으로 감추고 있지는 않은가? 우리는 스스로의 취향과 성취 뒤에 있는 특권을 얼마나 감추고 있는가? 우리 모두 이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박혜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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