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독재자가 될 생각은 없고 애초 불가능하지만, 만약 될 수만 있다면 말이다…
아마도 평생 해결하지 못할 궁금증이 있다. 너무 궁금해서 죽어버릴 것 같지만 신이나 세계의 독재자쯤 되는 위치에 서야만 해결할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당신들이 정오부터 오후 두 시에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얼마나 흐트러진 옷차림을 하고 있는지, 어떤 마음으로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어떤 생각을 하는지, 그조차도 아니라면 어떤 행위로 오후 두 시라는 시간을 견디는지가 궁금하다. 82억 인구를 하나하나 붙잡고 물어보고 싶을 만큼 궁금하다. 그래, 아마도 나에게 어떤 방식으로든 절대권력이 생긴다면 가장 먼저 전 세계에 CCTV를 설치할 셈이다. 정오부터 오후 두 시에 화면을 켠다. 그리고… 그냥 구경할 생각이다. 소파에 앉아 감자칩 까먹으며 TV를 보듯 그저 바라보고 싶다. 당신들이 정오부터 오후 두 시까지 무엇을 하며 지내는지.
흥미가 붙은 날에는 오후 두 시 이후에도 인간 구경을 지속할 의향이 있긴 하나, 82억 개의 일상을 너무 오래 보고 있으면 나의 체력에 지대한 문제가 생길 것 같으니 하루 두 시간으로 우선은 정했다. (비슷한 이유로 필자는 독재자들을 아주 싫어한다. 그러니까 지금까지 인류 역사 속의 독재가 타인을 이해하고 나를 이해하기 위해서였던 적이 단 한 번도 없다고?)

왜 이렇게 이 시간대에 집착하는지 궁금할 수도 있겠다. 굳이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다 : 정오부터 오후 두 시는 인간의 생체리듬이 자연스럽게 떨어지는 시간대이다. 각자의 기상 시간과 생활 패턴에 따라 다를 수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인간이 그렇게 작동하고 있다고 믿는다. 구글에 ‘낮잠 시간 추천’을 검색해 보라. 지식을 나누고 싶어 하는 많은 이들이 출처도 제대로 명시하지 않은 채 낮잠 시간대는 정오부터 오후 두 시를 추천하고, 20분 이상의 낮잠은 밤의 숙면을 방해한다고 말하고 있을 것이다. 각자가 낮잠의 중요성을 설파하며 수면 전문가 매슈 워커를 인용하기도 하고, 어떤 이들은 나사를 인용하기도 한다. 시간대에 관해서는 외국의 클리닉 연구 결과를 인용하기도 하며… 어디 그뿐인가? 직장인이 가장 피곤해하는 시간대이기도 하다. 새벽이 정신적으로 취약해지는 순간이라면, 오후 두 시는 육체적으로 취약해지는 순간인 것이다. 주말, 이른 오후. 정오 무렵 남중하던 태양은 삐뚜름하게 하늘에 걸쳐 있다. 창문을 열면 나른한 바람이 불고, 밖으로 나가면 덥혀진 땅이 다리를 뜨듯하게 데운다. 권태롭다. 하루가, 삶이 너무도 길다고 여기게 되는 시간. 나는 이 시간을 마(魔)의 시간으로 정의하고자 한다.
이 권태의 시간에, 이 마의 시간에 나는 주로 ‘생각하기’ 행위를 한다. ‘새벽감성’같은 시간이다. 감성에 기대어 이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생각을 줄줄 늘어놓다가, 내일을 생각하며 억지로 잠드는 새벽. 반면 ‘마의 시간’ 은 억지로 잠들수도 없다. 이 시간이 권태로운 만큼 깊은 잠을 자버리면 눈 뜨는 순간은 또다시 다음날 오후 두 시가 될 것이 불을 보듯 뻔하니. 그런 이유로 수틀린 생각을 시작하게 되는데, 수틀린 것들이 모여 하루를 물 쓰듯 버려버리는 인간 쓰레기 행위가 주말 오후 두 시마다 반복되고 있다.(수도세를 주의하자.) 오늘, 내가 고른 ‘오후 두 시’ 라는 주제는 그렇게 나온 주제다. 나의 권태의 순간에 태어난 수틀린 생각들을 공유하고, 다른 이들이 오후 두 시의 권태를 이기는 방법에 대해 알고 싶다는 마음에서 출발했다. 어디 가서 절대 말할 수 없었지만, 어딘가에 말하고는 싶은 마의 시간의 이야기들을 흘려보겠다.
- 가끔 미치도록 쓰레기가 (조금) 먹고 싶어질 때가 있어 (feat. 가을방학)
음악을 듣고, 책을 읽고. 영화를 보고 사람들을 만나고… 우습지만 예전엔 미처 하지 못했던 생각도 많이 하~ 게 돼…~ 가을방학의 ‘가끔 미치도록 네가 안고 싶어질 때가 있어’도 이른 오후에 쓴 가사가 아닐까? 하하. 고백하자면 나는 가끔 쓰레기가 먹고 싶어질 때가 있다. 한 입씩 먹어보고 모든 쓰레기의 맛을 알고 싶다. 그걸 전부 기록하고 싶다. 먹으면 죽을 것 같은 쓰레기도 솔직히 먹고 싶다. 별로 오래 살고 싶지는 않지만, 쓰레기를 먹어도 죽지 않을 수 있다면 영원히 살아도 괜찮을 것만 같을 지경이다. 여하간 지난 주말의 오후 두 시, 나는 방 휴지통을 열고 한참을 쳐다보는 중이었다.
초등학생 시절, 내 앞에서 샤프심 먹방 하던 애가 기억난다. 그 애의 이름도 얼굴도 기억나지 않지만 걔가 특정 기간동안 내 짝꿍이던 건 기억 난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다짜고짜 샤프심을 먹었던 건 아니고, 걔는 항상 샤프심 끝에 풀을 묻힌 다음 교실 천장으로 그걸 던졌다. 그러면 교실 천장에 샤프심이 답싹 붙었다. 그게 그냥 신기했다. 샤프심의 양쪽 면에 풀을 붙인 것도 아니고 한쪽 면에 풀을 붙였는데도 정확히 그 면이 천장에 붙는다. 위로 던져지는데 흔들리지도 않는 건가? 물리학적인 뭔가가 있는 건가? 하는 궁금증도 있었다. 그래서 나도 그 애랑 같이 천장에 샤프심 붙였다. 교실 천장은 깨끗했는데 걔랑 내 자리 위만 고슴도치 같았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애가 너 샤프심 먹을 수도 있는 거 알아? 라는 말을 했다.
뭘 처먹는다고? 하여간 신기한 놈이라는 생각을 하며 걔가 샤프심을 와작와작 씹어먹는 걸 봤다. 샤프심을 씹어먹으면 이빨에 흑연이 낄 것 같았는데 그렇지도 않았다. 석탄 만진 사람처럼 입가가 까매질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니었다. 맛없지 않냐고 했더니 생각보다 맛있단다. 그래서 나는 대답했다.
그럼… 그럼 나도 먹어볼래.
그래. 안 죽는다니까?
와작와작.
어때?
와 진짜 아무 맛도 안 나네… 약간 쇠 맛 난다…
태어나서 했던 경험 중 가장 정신적으로 설레는 경험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경험이었다. 먹으면 안 될 것 같은 걸 먹으면서 나를 망치는 경험. 뭔가 몸에 좋지 않은 것 같은 느낌이 나는데도, 미세하게 혹은 은은하게 스스로를 파괴하는 감각. 치아가 잘게 부순 샤프심이 식도를 타고 내려간다. 미세한 입자가 식도를 긁으면 어쩐지 차가운 느낌이 든다. 입에 남는 쇠 맛… 그래, 그리고 나는 샤프심 먹는 행위에 완전히 중독되어서 걔랑 짝꿍인 기간 동안 종종 샤프심을 씹어먹었다. 자리를 바꿔 다른 애랑 짝이 된 이후로는 샤프심을 먹지 않았다. 이십 대 중반인 지금까지도. 지금 필자는 오후 두 시에 짧은 낮잠을 자고 일어난 오후 세 시 반에 이 글을 쓰고 있고, 책상 연필꽂이의 샤프심을 빤히 바라보고 있다.

이 짤을 굉장히 좋아한다. 대체로 따르며 살고 있다. 갈까 말까 할 때는 가고, 살까 말까 할 때는 안 샀다. 말할까 말까 할 때는 말을 아꼈다. 그렇게 살면 주변으로부터 칭찬받는다. 내 의지와는 무관하게 만사가 생각보다 잘 풀린다. 근데 이거 먹어도 되나 안 되나 할 때는… 그냥 먹었다. 자취생 시절 특히 그랬다. 상한 음식 앞에서 잠시 생각하다가, 이거 ‘적당히’ 먹으면 괜찮지 않나? 나 자취생이라 돈 없으니까… 같은 이유를 대며 그냥 먹었다. 정말 돈이 없어서 상한 음식을 먹었냐고 물어본다면 “그냥 그 느낌을 또 느끼고 싶었던 것뿐이야…” 같은 말밖에 못 할 것 같다. 먹으면 안 될 것 같은 걸 적당히 먹으며 은은하게 스스로를 파괴하는 행위로부터 오는 쾌락을 찾고 싶었을 뿐이다.
나는 쓰레기통 앞에 앉아 샤프심을 처음 먹었던 날을 되새김질했다. 그런 걸 먹고도 안전했을 때의 고양감, 그 설렘을 돌이켜본다. 그러다 어떤 생각에 닿는다. 롤러코스터다. 쓰레기를 퍼먹고 싶어질 때는 꼭 ‘조금’이라는 성격이 붙는다. 롤러코스터에 오를 때도 똑같다. 떨어지면 죽을 것 같은 곳에서 낙하한다. 단, 안전장치를 온몸에 두른 채로. 안전이라는 보험이 있기에 우리는 비로소 그 높은 곳에서 낙하하는 즐거움에 자신을 내던질 수 있다. 안전장치 없는 롤러코스터를 생각해 보라. 만약 티 익스프레스의 안전장치가 없었다면 대기 줄은 지금의 십분의 일도 안 됐을걸. 여하간 두 행위의 공통점은 ‘안전’의 영역에서 ‘위험’을 바라보는 행위라는 데 있다. 세계의 수많은 놀이동산과 놀이기구를 생각해 보면, 이는 아주 보편적인 인간의 욕구일 것이다.
나는 정말로, 인류의 높은 비율이 위험을 훔쳐보고 싶어 한다고 생각한다. 안전의 영역에 발 디딘 채로. 그러니 쓰레기 맛보기와 롤러코스터 탑승은 본질적으로 아주 가까운 곳에 있다고 여겨도 내게는 큰 오류가 없다. 쓰레기를 먹고 싶어 하는 사람은 적지만 롤러코스터에 타고 싶어하는 사람은 세상에 많을 뿐이다. 나의 욕망이 어디 가서 말할 수 없는 방향으로 발전했을 뿐, 그 기원은 다른 이들이 즐기는 롤러코스터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그런 깨달음을 얻은 나는, 별도의 섭취 없이 쓰레기통을 닫을 수 있었다.
10월은 날씨가 좋으니까, 놀이공원이나 한번 가봐야겠다. 그런 생각을 하며 마의 시간을 마무리했다.
- 애정 총량의 법칙
탈덕을 경험한 적이 있다. 사랑하던 밴드가 성범죄를 저질렀기 때문에. 기사를 확인한 시간은 하필 주말 오후 두 시였다. 마의 시간을 이기지 못하고 최애 밴드를 구글링한 나의 잘못이었던 걸까? 탈덕의 오후 두 시, 악기 든 집단을 마음에서 내보내니 머릿속에 다가오는 것은 영화 ‘비포 선셋’이었다. 진부하지만 그 영화를 좋아한다. 가장 좋아하는 장면은 자동차 속 대화 장면. 셀린의 감정 변화를 중심으로 영화를 읽으면 이 장면이 사랑스럽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오랜만에 만난 사랑하는 이를 앞에 두고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하다가, 다시 9년 전처럼 이야기를 나누다가… 차에 타고 멀어질 시간이 다가오니 감정이 사무친다. 막 울 것 같은 얼굴로 화내듯 읊조린다.

“네가 쓴 책을 읽기 전까지는 괜찮았어. 마음이 뒤숭숭해. 전엔 내가 얼마나 낭만적이었는지, 얼마나 꿈이 많았는지 깨닫게 되었거든. 근데 지금은… 이젠 사랑을 안 믿어. 감정이 느껴지지도 않아. 그날 밤에 다 쏟아부어서 아무것도 남은 게 없어. 네가 내 모든 걸 다 가져가 버린 것 같아. 심장이 식어서 사랑 따위 느껴지지 않는다고.”
괴로움은 인정하지 않으면 그만이다. 좀 빡세도 눈 흐리게 뜨고 할 일 하면, 무너지기 전까지 삶은 살아진다. 허나 괴로움을 인정해 버리는 순간, 그 사람의 존재는 옅어진다. 아무렇지 않게 새 연인의 이야기를 하던 셀린이, 제시의 책을 통해 괴롭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토로한다. 너한테 다 써서 남은 게 없다고 막 울고불고 화낸다. 너무 사랑스러워서 그 장면을 계속 떠올리다 보니 나도 그렇게 생각하게 되어버렸다.
어떤 이유로든 감정이 끝날 때가 있다. 그게 사람이든 일이든 뭐든! 의도치 않게 회복 불가능하다고 판단되는 상처를 받아 그만두거나 떠나고 싶어질 때가 모두에게 한 번쯤 있지 않던가? 필자는 그럴 때마다 괴로웠다. 회복 불가능해 보이는, 비가역적인 충격을 받아 더 이상 무언가에 대해 노력할 힘이 남아있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 무엇보다 괴롭다. 그들의 음악에, 그들의 연주에 더 애정을 쏟고 싶지만 그럴 수 없었고,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럴 때면 왜 내 마음은 화수분이 될 수 없는가? 나는 그들의 음악을 받고 위로받아 왔으면서, 그들의 가사에 눈물 흘렸으면서 나의 열정과 사랑은 여기까지가 한계인가? 라는 생각을 하니, 자연스럽게 감정 총량의 법칙을 떠올리는 것이었다. (혹자는 성범죄자니까 탈덕하는 게 당연하다고 말할 것 같다. 나 또한 주지하고 있는 사실이나, 그럼에도 마음이 힘든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진심으로 좋아하던 밴드였기 때문에.)
그러니까, 우리는 태어나면서 안에 누군가(혹은 무언가)에게 줄 수 있는 애정을 모두 한꺼번에 안고 태어나는 것이다. 그리고 평생에 걸쳐 그 애정을 조금씩 뿌리며 삶이 흐른다. 그러다가, 애정을 한 번 거하게 쏟아버리기도 하고 쏟은 애정을 닦아버리기도 하고… 그걸 애정이 비축된 물통에 다시 짜 넣기도 하고. 그렇게 살아가다가, 어쩌면 나 외의 것에게 줄 수 있는 애정이 바닥났을 때 죽음을 맞이하는 게 아닐까? 솔직히 애정이 바닥나서 죽는다는 건 조금 헛소리 같지만, 여하간 마의 시간을 보내던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사용할 수 있는 애정의 총량은 태어나며 정해진다는 것이 바로 내가 정의한 애정 총량의 법칙이다.
좋아할 만큼 좋아했을 뿐이다. 밴드는 원래 사고를 많이 친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 이상으로 내가 당신들에게 애정을 쏟을 수는 없었다. 나를 위로해 준 것은 고마운 일이지만 더는 안 되겠다… 그런 전여친 같은 생각을 하면, 스스로의 ‘화수분 될 수 없음’에 대해서 조금 관대해진다. 사랑하는 것은 내 마음이다. 사랑이 끝나는 것도, 슬프지만 내 마음이고. 그렇게 애정 총량의 법칙을 떠올리며 마음의 안정을 찾게 된다. 완벽한 오후 두 시의 감정적 자기 위로다.
탈덕의 오후 두 시. 다음으로 고민했던 건 앞으로의 일이었다. 내가 셀린의 대사에 영감받아 만든 ‘감정 총량의 법칙’이 정말이라면, 앞으로는 애정을 아끼며 살아가야 하는 것일까? 언젠가 만날 무언가를 위해 아껴 두게? 그런 생각을 했던 시절도 있다. 허나 지금은 그냥 되는 대로 살기로 결정했다. 너에게 온 마음을 쏟아버렸다고 우는 셀린의 얼굴은, 슬프지만 적어도 불행해 보이지는 않았기 때문에.
- 나는 당신들의 오후 두 시도 궁금하다 : 마치며
이런 상념들을 여기에 써도 되는 걸까? 라는 고민을 정말 많이 했다. 허나 서문에서 말했듯 나는 82억 개의 눈을 가지고 싶다. 신이나 독재자가 되고 싶을 만큼 나에게는 중요한 문제다. 그런데 아무래도 신은 세상에 없는 것 같고 독재자가 되는 건 피곤할 것 같다. 그래서 썼다. 내가 먼저 나의 오후 두 시를 이야기하면 누군가가 내 옆에 와서 자기 이야기를 꺼내줄까 봐, 그래서 그게 나에게 닿게 될까 봐. 나의 오후 두 시, 반복되는 물음표 속에서 탄생한 나의 마침표는 상념이었다. 나는 물음표-마침표로 귀결되는 (종종 여전히 물음표로 남은 것들도 있긴 하나) 이 마의 시간을 꽤 즐기며 살아가고 있다. 메모장 속에 남아 어딘가에 가 닿기를 기다리는 생각의 흔적들이 그것을 증명한다. 또다시 당당하게 이런 이야기를 꺼내어 볼 기회가 내게 올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 마음이 설렌다.
나는 당신들이 각자의 오후 두 시에 대해 떠올려 보기를 바란다. 그리고 어떤 방식으로든 나에게 이야기를 건네주길 소망한다. 나와 비슷하게 수틀린 생각을 늘어놓는 이여도 좋고, 업무에 몰두하는 이여도 좋다. 아니, 오후 두 시가 권태롭지 않은 이들의 이야기도 궁금하다. 나에게 괴로운 시간이든 타인에게 즐거운 시간이든, 오후 두시는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시간이니까.
신소영
rubysnow@naver.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