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Poul Kjærholm (1929–1980), Danish furniture designer, inspecting the assembled frame of the PK22 in collaboration with a metalworker (right).
1
2024년 6월, 덴마크의 라이프 스타일 브랜드 프리츠한센(Fritz Hansen)이 주최하고 큐레토리얼 스튜디오 아넥스(Annex)가 기획한 〈폴 케홀름(Poul Kjærholm) 회고전〉의 단기 스태프로 지내던 나의 주말은 언제나 서촌에서 시작해 서촌에서 끝났다. 그 무렵 서촌은 불현듯 치솟는 무더위와 가늘게 내려앉는 빗줄기, 그 사이에 스며드는 눅눅한 습기가 서로 뒤섞이며 거리의 온도를 만들어냈다. 그런 초여름의 공기가 절정에 다다르는 오후 2시는, 건물 내외로 사람이 가장 붐비던 시간이었다. 공교롭게도 나에게 할당되었던 식사 시간과 맞물려 잠시 자리를 비워야 했고, 수많은 관람객들 사이를 빠져나와 통의동 유스퀘이크 갤러리 밖으로 발걸음을 옮기곤 했다.
장마철이 찾아온 어느 날이었다. 유독 비가 거세고 안개가 두텁게 내려앉던 날에는 더 먼 곳을 찾을 필요가 없었다. 근처에서 들기름 막국수를 먹으며, 그날의 전시장과 관람객들의 모습을 곱씹듯 되새겼다. 비가 온 탓인지 한동안 북적이던 전시장은 드물게 한가했고, 폴 케홀름의 가구들과 나만이 그 적막을 나누고 있던 오후 1시 50분 무렵이었다. 곧 먹게 될 들기름 막국수를 떠올리며 시간을 흘려보내던 그때, 한 관람객이 다가와 내게 질문을 건넸다.
「이건 뭐예요?」
관람객분이 가리킨 방향으로 고개를 틀었다. 그것은 프리츠한센의 PK 컬렉션 중 다이닝 테이블인 PK54의 확장형(extention) 링이었던 PK54A였고, PK54A와 같은 목재 소재의 거치대 위에 놓여져 있었다. 관람객들로 하여금 일말의 캡션도 없이 가구와 액자만이 적재적소에 배치되어 있던 3층 공간에서 위화감을 느낄만했을 것이다. PK54에 관한 질문은 당시 그 관람객분이 처음이었고, 단순히 ‘PK54의 익스텐션인 PK54A라는 제품입니다’라고만 설명을 건네었었다. 이후 관람객분은 친절한 표정으로 인사를 하시고는 다시금 공간을 둘러보셨지만, 되려 호기심이 생긴 건 내 쪽이었다.


그날의 점심시간은 머릿속을 가득 메운 한 가지 질문으로 흘러갔다. 식사 후, 나는 기획팀의 총괄을 맡고 계신 분께 폴 케홀름의 PK54A 제작 의도에 대해 조심스레 여쭤보았다. 그 분께서 설명해 주시기를, PK54A는 익스텐션으로 기능하지 않을 때, 창고에 보관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조형물 혹은 오브제(objet)로 감상될 수 있도록 의도한 작품이라 하셨다. 분명 가구는 사용을 전제로 한 기능적 정의로 디자인의 영역에 속하지만, 이 지점에서 드러나는 순수 미술적인 성격은 내게 묘한 감흥을 남겼다. 그 후부터, 나는 PK54A에 관한 질문을 받을 때마다 언제나 제작 의도를 함께 전하며 설명하곤 했다.
2
의도치 않게, 내 주변에는 디자인을 전공했거나 관련 업계에 종사하는 지인들이 적지 않았다. 그들과 나눴던 대화를 비롯하여, 레퍼런스 삼아 조사한 디자이너들의 인터뷰를 살펴보면, 순수 미술을 전공한 나와의 관점 차이가 극명하게 드러나고는 했다. 이는 창작물에 담긴 담론이나 사회적 책임과 관련된 것이 아니라, 순전히 창작자의 정체성에서 기인된 것이었다. 어쩔 수 없이 ‘합리적 기능성’으로 귀결되는 디자이너들과 달리, 동시대의 순수 미술은 그와 대척점에 서 있다. ‘합리적’이라는 개념 자체에 의문을 던지고, 오히려 비합리적인 것을 드러내며, 제 기능을 하지 못한 채 놓여 있는 사물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다. 기능을 잠시 유예한 상태의 모호함이 조각물로서 실재하기를 바라며 선택하는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디자이너가 ‘합리적 기능성’으로서의 정체성을 거부한 것과 조각가가 가구라는 개념을 갖고 와 조형한 것은 엄연히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이쯤에서 짚고 넘어가 보자. 그렇다면 조각이란 무엇인가. 단순히 물성을 지닌 입체 조형에 불과한 것일까? 동시대 미술에서 조각은 무엇이든 될 수 있다. 누군가에게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처럼 작동하는 전능한 개념일 수도 있고, 또 다른 이에게는 단순한 말장난으로 치부될 수도 있다. 관련 의제는 2022년 SeMA에서 열린 《조각충동》전에서 동시대 작가 17명과 함께 선보인 바 있을 만큼 꽤나 큰 화두였고, 이는 여전히 유효한 주제다. 앞서 던진 질문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인다면, 화이트큐브와 좌대 혹은 특정 공간에 놓인 모든 사물, 심지어 종이 한 장마저도 조각이 될 수 있다. 과거의 조각가들이 중력과 싸우며 묵직한 물성으로 ‘설 수 있는 것’을 만들었다면, 오늘날의 조각은 건축에 가까운 장소 특정성과 공간적 관계를 긴밀히 탐구하고 있다. 그런 맥락에서, 다이닝 테이블 옆에 놓인 PK54A 역시 조각일 수 있다. 아니, 나에게 처음 물어봤던 관람객이 PK54A를 마주 봤던 그 순간부터 그것은 이미 조각이었을지도 모른다.
3
폴 케홀름의 가구들을 마주 보면, 동시대 20세기 후반 모더니즘의 여명기에서 활동했던 도널드 저드(Donald Judd)가 떠오른다. 형태의 절제, 재료의 정직성, 비례의 조형성, 실용과 조형의 경계. 둘은 교묘하게도 미니멀리즘 의 미학으로 긴밀히 맞닿아 있다. 그들은 각각의 영역에서 형태의 진실성과 순수성을 미학적 신념으로 공유한 것이다. 실제로 건축과 디자인도 저드에게 큰 관심사였고, 그의 활동은 가구 디자인 제작과 공간 구성에 이르기까지 확장되었다.
그러나 두 사람의 접근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저드는 작가의 개입과 의도를 최소화한 채, 기하학적 구조와 있는 그대로의 물성을 드러내는 조형미를 실천했다. 반면 케홀름은 디자이너로서 기능적 실용 위에 놓인 형태의 긴장감과 비례의 조화를 탐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폴 케홀름의 PK54A를 단지 가구로만 규정할 수 없는 이유는, 그것이 기능의 영역을 넘어 공간 속에서 조형적 존재를 자각하기 때문이다. PK54A는 통의동 유스퀘이크 갤러리의 공간을 가로지르며, 관람객 각자에게 미적 사유와 해석의 여백을 발생시켰다. 이 지점에서 케홀름의 작업은 저드가 「특수한 오브제(Specific Objects)」에서 제시한 개념과 오묘하게 교차한다. 가구도 조각도 아닌 사이의 존재, 기능과 조형의 경계에 위치한 하나의 오브제. 바로 그 사이성 속에서 PK54A는 비로소 가구이자 조각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4
전시는 폴 케홀름이 제작했던 가구 컬렉션을 재료와 조립 단위로 해체하거나, 조형물처럼 전시장 곳곳에 배치했다. 또 일부 층은 캡션 하나 없이 쇼룸처럼 연출되어, 기능과 조형의 경계를 흐렸다. 결국 관람객들은 가구라는 기존의 기능적 관념과 전시 공간이라는 제도가 충돌하는 지점에서 인식 갈등을 경험하게 되었고, 이윽고 나와 직원들은 PK54A 뿐만 아니라, 착석 및 접촉 가능 여부에 대한 질문도 굉장히 많이 건네받았었다.
더구나 폴 케홀름은 본인 만의 작업 준칙에 의거해, 다소 간결하고 절제된 가구 디자인 속에 사회적 의미를 담고자 했다. 케홀름은 가구에 민주성을 부여하려 노력했는데, 이를테면 함께 식사를 즐기는 테이블은 모두에게 평등함을 선사해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본질적으로 방향의 위계가 결여된 ‘원’의 형태를 갖고 온 원형 다이닝 테이블을 제작했는데, 그것이 앞서 언급한 PK54다. 이렇듯 케홀름에게 가구의 기능은 그다지 주 관심사가 아니었다. 그가 주목한 것은 공간적 이해와 사회적 경험에서 비롯되는 가구의 역할이며, 그의 목표는 가구가 공간을 형성하는 매개가 될 수 있도록 하는 것에 있었다.
그렇다면 동시대 맥락에서 폴 케홀름의 작업은 어떻게 읽힐까. 그의 작업 철학와 더불어 스튜디오 아넥스가 선보인 연출 의도는 같은 해 《IMA Picks 2024》에서 드러난 현대 작가들의 예술적 실천 태도와 매우 유사하다. 이를테면, 김민애(b.1981)의 《화이트 서커스》에서 입장하자마자 마주할 수 있는 〈관람 혹은 관망〉과 〈은폐, 위장, 방어〉는 작품과 공공물의 경계를 모호하게 느껴지도록 유도했다. 공공 계단을 연상시키는 〈관람 혹은 관망〉은 관람객이 작품 위를 오르며 스스로의 위치를 전환하게 만든다. 그들은 더 이상 관람자가 아닌 공간을 관망하는 자가 된다.

폴 케홀름의 가구가 당시 북유럽의 가구들과 대조되는 지점도 다름 아닌 높이에 있었다. 그의 가구는 지면에 가까울 만큼 낮게 설계되었으며, 안정적이고 정제된 조형적 비례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사용자 입장에서는 같은 공간의 다른 가구나 요소들이 다소 불편하게 느껴진다. 따라서 그의 가구를 편히 사용하기 위해서는 공간 내 다른 불필요한 요소를 줄일 필요가 있었다. 비로소 공간에 남는 것은 삶의 흔적이 아니라 사람이었으며, 사람 사이의 관계만이 남기를 바라는 그의 의도가 분명히 드러난다. 이는 관람객의 수평적 좌표를 수직적으로도 이동시켰던 김민애의 동시대 조각적 사유와 맞물린다.

작품을 실내 장식으로서 재조형한 프로젝트 룸 공간은 애초에 전시를 위한 물리적 공간인 화이트큐브로부터 탈피되어 있다. 프로젝트 룸 공간에 재조형된 몇몇의 작품들은 관람객이 기존 조각처럼 읽지 못하도록 낯설게 놓여 있다. 이는 작품이 갖고 있던 의미나 조각적 문법, 전통적 전시 방식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가구나 인테리어 소품처럼 공간 속 기능과 배치의 논리를 따르는 것이다. 이렇듯 물질과 공간의 관념적 구성을 탈피하고 재구성하는 시도는 기존의 관념으로 속박된 틀을 부수고 해체된 관계에 다시금 맥락을 부여하는 김민애의 예술적 실천 방식이라고 볼 수 있다. 그의 조각이 대부분 좌대를 필요로 하지 않거나, 혹은 공공 구조물이 되기로 의도한 것은 미술가로서의 현실과 미술의 관계성을 그의 방식대로 재정립했기 때문일 것이다.
두 작가는 각각의 시대와 장르마다 요구되는 고정된 관념과 타협하지 않았다. 사회적 상호작용에서 비롯되는 공간적 이해를 보다 중요시했고, 이를 예술적 의도로 구현하고자 했다는 점에서 닮아있다. 그들의 작업은 문화적 언어로서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다소 모호해 보일지라도, 결코 단일한 해답이나 완결된 결말로 귀결되지 않는다. 복잡하게 얽힌 관계 속에서 다시금 질문을 생성할 뿐이다.
5
오후 2시는 꽤나 다층적인 뉘앙스를 지닌 시각이다. 누군가에겐 한낮의 정점이지만, 또 다른 누군가에겐 소진과 쇠퇴의 시작점일 수 있다. 어떤 이는 애매모호한 경계의 시간대로, 또 다른 이는 너무도 단조롭고 권태로운, 지극히 평범한 시각으로 여길지도 모른다. 나로 빗대어보면, 요즘은 그 당시처럼 잠시 숨 고를 만한 오후 2시의 여유조차 쉽게 허락되지 않는다. 인지하지도 못할 그런 시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연히 다가왔던 그 질문을 시발점으로 지금에 이르기까지, 모호하다고만 여겼던 것들이 작게나마 하나둘씩 명료해져가고 있음을 느낀다. 그런 의미에서 PK54A는 오후 2시와 교묘하게 닮아 있다. 누구에게 어떻게 읽히든 상관없다. 그 존재만으로 각기 다른 물음표를 던지고, 저마다의 미의식을 생산해 내고 있으니까. 공간과 조응하는 작품의 현존성과 유일성, 그것이 벤야민이 기술복제시대를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많은 사람이 전시장을 찾는 까닭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직접 찾아가야만 경험할 수 있는 의외적인 서사 속에 위치한다.
물론 그럼에도 여전히 예술은 범잡을 수 없이 거대하고도 복잡한 세계다. 돋보기를 들고 뚫어져라 쳐다보아도, 어쩌면 돋보기를 들수록 비합리적인 것들 투성이일지도 모른다. 정답은 없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세상도 백이면 백 명백하지만은 않다. 모호하기 그지없고, 잘 안다고 착각하는 것들 투성이일지도 모른다. 결국 어떤 무엇도 아니라면 어떠한가. 우리의 도처는 결코 정의와 질서, 제한과 규칙만으로 작동되지 않는다.
통상적인 의미망 너머에 기다리고 있는 건, 상상과 환상의 영역과 아슬아슬하게 맞닿아 있는 가장자리의 회색지대다. 선구자들은 일찍이 이 영역을 발견하고, 기존의 것들을 부수고 다시 조립하며 궁리해 왔다. 예술가들은 이를 아방가르드의 언어로 연결하고 구현해 왔다. 이윽고 해방된 길이 실낱같고 연약한 작은 구멍일지라도, 그 불온함을 견디고 모호함을 가로지르기 위해 나 역시 보고 또 읽고 써보려 애써볼 뿐이다. 적어도 나에게 오후 2시란 그렇다. 이 글을 읽고 있는 그대들에게 오후 2시는 어떤 의미인가?
1-3 All images of Poul Kjærholm and the PK series are provided courtesy of Fritz Hansen.
4-6 All other exhibition photos were taken by the author.
소중한
towertvoll@gmail.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