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 여름, 오후 두 시
스페인에서는 낮잠 시간이 따로 있대.
지구본을 빙 돌려봐도 스페인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던 어린 시절, 누군가 내게 그렇게 말했었다. 그 곳에서는 일 년을 꼬박 길게도 작열하는 태양에 지치지 않기 위해, 가장 더울 시간에 잠을 잔다고. 회사이건 학교이건 낮잠 시간이 있다고. 그 말을 들으며 컴퓨터를 두드리던 정장 차림의 회사원들이 알람이 울리자 일제히 이부자리를 펴고 곧바로 잠에 빠져드는 모습을 상상했다. 구두를 신은 채로 잠자리에 들까. 잠이 제대로 오긴 하려나. 생각할수록 퍽 웃긴 풍경이었다.
시에스타(Siesta).
스페인어로 낮잠이라는 뜻이다. 낮 기온이 40도를 훌쩍 넘는 여름의 스페인에서는 오후 두 시부터 다섯 시까지 하던 일을 멈추고 집에서 휴식을 취하거나 커피를 마시는 여유를 가진다. (물론 아쉽게도 회사에서 구두를 신고 자지는 않는다.) 너무 더워서 일에 집중이 안 될 때 차라리 푹 쉬고 돌아와서 일하자는 의미의 문화이다.
스페인에서도 사무실마다 에어컨이 달린 도시에서는 시에스타 문화가 점점 사라져가고 있다고는 하지만, 일을 하다 말고 멈춘다는 발상만으로 한국인인 나의 입장에서는 충격적이었다. 아니, 일이 안 끝났는데 어디를 가나. 급한 일을 제쳐두고 수다 떨며 커피를 마신다는 행위가 여유 정도를 넘어서 못내 게으르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또 한 편으로는 일을 하다가도 시원한 그늘에서 여유롭게 낮잠을 즐긴다니, 왠지 꿈만 같고 부럽기도 했다.
언제쯤 낮잠을 달게 자봤던가.
최근에는 없었던 것 같다. 밤을 꼬박 새우고 무거운 눈꺼풀에 못 이겨 점심때 쓰러지듯 자보기는 했다. 물론 하루 종일 잠만 잔 날도 있었지만, 그때는 살기 위해 잔 것이기에 잠이 아니라 혼절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그만큼 낮잠과 일상이라는 단어가 공존할 수 있다는 게 낯설게 느껴진다. 한국인의 업무 효율과 학업 성실도를 기준으로 하면 낮잠 시간을 둔다는 건 사치에 가깝기 때문이다. 모두가 너무 빠르게 많은 일을 해낸다. 그 ‘모두’에 뒤처지지 않기 위해 수면시간을 더 줄이고 일을 더 한다. 뒤로 가지 않고 잠깐 멈추었을 뿐인데 남들 달리는 속도에 뒤처지는 것 같다.
생각해 보면 절대적인 시간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닌데 왜 마음만 항상 조급해지게 되는지. 휴학 기간에도 자격증이나 대외 활동 칸을 뒤적거리며 든 생각이다. 휴학이라는 명분을 가지고도 마음 놓고 누워있자니 뭔가 해야만 한다는 부담감에 휩싸였다. 그렇다고 무얼 대단히 하지도 않으면서 걱정하는 시간만 늘어났다.
처음에는 그저 내가 잘 못 쉬는 사람인 탓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주위를 둘러보면 꼭 그런 것도 아니다. 어젯밤 토플 시험 준비로 밤을 새웠다는 친구는 눈 밑에 다크서클을 한아름 달고서도 자신이 너무 게을러서 남들보다 뒤처질지 걱정이라며 한탄한다. 그러나 내가 아는 그이는 누구보다 부지런하고 성실한 사람이다. 알바에, 공부에 주말 하루도 쉬는 것을 못 봤다. 그럼에도 자신의 속도가 너무 느리단다.
이 위태로운 뜀박질을 한 발 떨어져 바라보니 그제야 속도가 문제가 아니라 속도계 자체가 고장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애초에 결승선이 너무 버거웠다. 모두가 너무 빠른 속도로 달리기에 너도나도 점점 더 빠른 속도를 낸다. 그러나 멈추지 못하고 달리다 보면 언젠가 과부하가 걸려 펑 터져버리기 마련이다. 우리는 그 시한폭탄 위에 서 있다.
상향 평준화된 속도와 기준에 맞추다 보면 스스로가 만족스러워질 리가 없다. 이토록 우리를 부채감에 시달리게 하는 것은 조바심이 유전자 어드메에 새겨져 있기 때문일까. 서울에서 일하지 않는 것은 위선이나 횡령보다 더한 중죄이다.
스페인의 휴식이 낮잠이라면 한국의 휴식은 선잠과 같은 개념이다. 할 일을 끝내지 못해 죄책감을 가지다가 쓰러지듯 잠든다. 그러나 푹 잠들지는 못하고 계속 뒤척인다. 스스로 만족하지 못하기에 끝낼 수 없고, 끝낼 수 없기에 잠들 수 없다. 금방이라도 잠이 들 듯 고개를 숙이다가도 끝내 잠들지 못하는. 어쩌면 우리는 가수면 상태로 삶을 연명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영원히 밤은 오지 않는다.
II – 겨울, 오전 두 시
캄캄한 새벽, 심야버스를 타고 한강의 대교를 건너다 보면 서울의 밤은 별 대신 형광등 불빛으로 수놓아져 있다. 빌딩은 얼핏 낮인지 밤인지 분간이 안 될 만큼 층층이 불이 켜져있으며 사람들로 북적인다. 거리에는 형광빛 네온사인 간판들이 즐비하다. 가깝게는 편의점부터 멀게는 배달앱 속 야식 전문점에 이르기까지 발길 닿는 곳마다 불야성을 이룬다. 단언컨대 서울은 세계에서 밤새 가장 많은 곳이 열려 있는 도시가 아닐까.
서울은 모든 것이 빠르다.
하루 만에 택배가 도착하고 오 분 만에 음식이 나오는 일상을 살다 보면 낙서하거나 책장을 넘기는 일이 너무도 느리고 지루하게 느껴진다. 이를테면 멈춰서서 하늘을 바라보는 것, 차 한 잔의 꽃향기를 음미하는 것과 같은 사소한 행위들에 시간을 쏟는 일이 무용해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일까. 시간과 정성을 오래 들인 장인의 물건보다 공장에서 줄지어 나온 양산품들이 더 비싼 값에 팔린다. 100년 된 가게를 허물고 신식 아파트 단지를 짓는다.
이 속도가 적용되는 건 물건뿐만 아니라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늦게 대학에 가거나, 중년의 나이에 뭔가를 시작하는 것을 ‘흔치 않은 도전’이라며 잡지에 대서특필할 정도로 특이하게 여긴다. 세상에 발 디딘 지 얼마 안 된 20대의 청년도 중반이 넘어가면 사회인으로서 나잇값을 해야 한다는 부담감을 떠안는다. 밥값을 하려면 노동해야 한다. 취직하려면 좋은 대학에 가야 하고, 대학에 가려면 공부해야 한다. 그리고 또 반복. 어쩌면 악순환의 시작점이 여기인지도 모르겠다.
이런 맥락에서 쓰이는 ‘밥값’이라는 표현은 아마 한국에서밖에 없지 않을까? 문득 궁금해져 사전에 검색해 보니 밥의 값이라는 말 말고도 밥을 먹은 만큼의 일이나 대가를 비유적으로 표현하는 말이라고 한다. 참 이상하다. 누가 자기 몫만큼의 밥값을 하는지 어떻게 알 수 있나. ‘오늘 나는 쌀 몇 톨만큼의 가치가 있었나?’와 같은 자기평가와 검열을 끼니마다 계속해야 한다는 게 여간 힘든 게 아닐 수 없다.
참 슬픈 일이다. 사회가 노동자를 구성원이 아니라 생산성을 가진 부품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노동자는 생산성을 잃어버린 부품이 으레 그렇듯 쉽게 버려지고 금방 다른 것으로 대체된다. 많은 가치를 창출하는 사람은 신성시되고 가치가 없다고 판단되는 사람은 공동체의 구성원이 배제된다. 과연 어느 누가 죽을 때까지 가치 있을 수 있을까. 다시 말해 누구라도 사회에서 배제되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2024년 한국인은 연평균 1,908시간 동안 일을 했다는 통계1가 있다. 1988년에는 무려 2,934시간 동안 노동했다는 걸 고려하면 대폭 감소한 것이지만, 여전히 OECD 상위권이다. 고강도 노동에 비해 평균 수면 시간은 6시간으로 회사에서 돌아와 쉬는 여가 또한 턱없이 부족하다.2
굳이 통계까지 가지 않아도 퇴근 시간 지하철 2호선만 타보면 피곤한 얼굴의 직장인들에게서 일상의 애환이 느껴진다. 누구 하나 즐거울 수 없다면 우리는 누구를 위해 일하는 걸까?
1970년대 초, 대한민국은 산유국 혹은 풍부한 자원으로 자급자족하는 나라가 아니었다. 경제를 버티는 기반은 오직 값싼 노동력과 노동자들의 피땀이었다. 누군가의 어머니, 아버지, 언니, 오빠였던 이들이 손품 팔아 번 돈으로 공장을 세우고, 공장 팔아 배를, 배 팔아 건물을 세웠다. 여가 시간은 고사하고, 임금조차 제대로 주어지지 않는 일이 참으로도 많았다. 누군가의 손, 발, 몸과 마음을 희생시켜 축적한 부로 올린 건물들이 서울 땅을 가득 메울 때까지, 삶을 희생시켜 쟁취한 노동의 굴레바퀴는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오늘날, 비약적인 경제 발전으로 성장한 한국은 놀랍도록 많은 것이 달라졌다. 흙길은 아스팔트로 메워지고, 쌀이나 물이 부족한 일은 흔치 않아졌다. 세계 어디를 가도 한국인 여행자를 만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달라지지 않은 것이 하나 있다. 사회는 여전히 노동자들의 노력으로 굴러가고 있으나 그들을 사람이 아닌 부품으로 보는 체계는 여전하다. 모두가 꺼리는 궂은일을 하는 사람일수록 임금이 적고, 무가치한 인력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 누군가가 없다면 사회는 기반조차 쌓지 못했을 것이다.
밥값을 해야 한다고 그토록 강조했으면서, 막상 노동에 대한 정당한 값은 지급하지 않는다. 부는 대물림되고, 세상은 바뀌지 않았다. 누군가는 폐가 터지도록 있는 힘껏 달리고 있고, 대신 부를 축적한 누군가만이 스포츠카를 타고 질주한다. 잘 들여다보면 화려한 도시의 야경은 사실 누군가의 생을 태우는 향일지도 모른다. 문득 기분이 선뜻해진다.
무언가를 향해 달리는 것은 결승선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달리고자 하는 동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한 방향 트랙에는 휴식도 동기도 없이 오직 결승선뿐이다.
우리는 왜 아직도 숨이 벅차게 내달리고 있나. 여유를 가질 수는 없는 것일까.
III – 가을, 오후 두 시

가을비가 추적이는 오후 두 시. 머리가 복잡해 습관처럼 찾은 국립현대미술관에서는 ⟪2025 젊은 모색⟫ 전시가 한창이었다.
개인적으로 국립현대미술관의 큰 전시들 중 하나인 ⟪올해의 작가상⟫ 또한 매년 챙겨보는 편이지만, 전시로서는 ⟪젊은 모색⟫을 보는 것을 더 즐긴다. 올해의 작가상이 좋은 작품들에 영예를 안기는 시상식의 느낌이 강하다면, 젊은 모색은 일 년 동안 있었던 일을 모아보는 신문 스크랩 같다. 동시대인으로서 신진 작가들의 목소리를 통해 사회와 개인에 대한 다양한 시각을 보고, 공감할 수 있다는 점이 좋다.
이날은 전시장에 들어가자마자 홀린 듯이 이은희 작가의 영상 작업 ⟨섬섬옥수⟩ 앞에 걸음을 멈추었다. 백혈병을 유발하는 위험물질에 무방비하게 노출되는 반도체 산업 노동자들의 산업재해를 다룬 ⟨무색무취⟩에 이은 작업이다.
작가는 1887년 미국의 고무 공장 노동자들이 이황화탄소(CS₂) 중독으로 정신착란을 일으킨 것에서부터 시작하여 1988년부터 한국의 원진레이온 노동자 900여 명이 이황화탄소로 인한 직업병을 가지게 된 흐름을 쫓는다. 1993년 원진레이온은 창립 29년만에 폐업했으나, 기계는 몇 년 후 중국으로 넘어간다.
이 외에도 1985년 미국 IBM, 애플의 하청업체였던 중국의 폭스콘 등에서 일어난 산재 사건을 조명하며 자본주의와 산업이 노동자들에게 어떤 상흔을 남겼는지 대조하며 보여준다.3
1880년대 말에서부터 2020년대까지 100여 년이 넘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미국에서 한국으로, 한국에서 다시 동남아시아와 중국으로. 고무에서 레이온으로, 레이온에서 반도체로.
산업의 발전으로 발생한 인재는 선진국에서 개발도상국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노동자의 손을 거쳐왔다. 아무리 위험한 공정이라도 결국 누군가는 생산해야 하기에, 수많은 사람의 건강을 앗아간 산업임에도 끝내 사라지지 않는다. 대신 아직 이런 실정에 무지한 개발도상국과 노동자들에게 떠넘겨진다. 자본주의 시장에서는 노동자의 고통이 공장의 가동을 멈추는 손해보다 더 값싸게 취급되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대신 희생시키는 방식으로 만들어지는 해로운 공정이 만연하지만, 배부르고 등 따스운 시민들은 그것을 애써 모르는 체하며 소비한다. 지구 어딘가 먼 곳에서 일어나기에 자기 일처럼 와닿지 않기 때문이다.
⟨무색무취⟩에서 다룬 삼성 반도체 백혈병 산업재해 피해자 황유미 씨의 노트에는 반도체가 만들어지는 클린룸에 들어가기 위해 해야 하는 메뉴얼이 적혀있지만, 정작 화학 물질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방법은 적혀있지 않다.
반도체와 화학 물질로부터 사람을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손과 먼지로부터 반도체를 보호하는 기이한 풍경이다. 인간 존엄성과 재화 가치의 경계가 아슬아슬하게 무너진 산업사회 아래 노동자들은 누구에게도 보호받지 못한 채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다.
특히 정밀한 부품이나 의류 공정의 경우 어린 소녀들이나 주부들을 채용하여 생산율이 증가하도록 해왔다. ⟨섬섬옥수⟩에서 작가는 이들을 ‘카나리아 걸’이라고 표현한다. 산업의 발전 단계에서 희생되는 것을 광부들이 유독가스를 감지하기 위해 약한 카나리아 한 마리를 지하로 데리고 간 것에 빗댄 것이다. 이들은 반도체나 옷감의 화학성분 같은 유해 물질로 인해 불임, 피부병, 폐병은 물론이고 목숨을 위협하는 환경에서 일하고 있다.
영상의 중후반부에는 과도한 격무에 시달리던 중국 폭스콘의 노동자가 투신하기 전 적은 시가 삽입되어 있다.
“난 그들에게 유순해지도록 훈육되어 소리 지르거나 반항할 줄 몰라. 불평하거나 비난할 줄도 몰라. 그저 묵묵히 피로를 견딜 뿐. (…) 생산라인 옆 쇠처럼 붙어 서서 얼마나 많은 밤과 낮을 그렇게 선 채로 잠들었던가.” 4
작가는 노동자들을 동정해야 할 피해자로 그리지 않는다. 그들 또한 회사에 소속감과 자부심을 느끼며 정당하게 쌓아온 자신의 노동을 자랑스러워하는 생산자로 표현한다.
문제는 그들을 기용하는 기업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에 있다. 누구보다 똑똑한 CEO들은 이런 노동이 당연하다며, 위험성은 없다며 노동자들을 기만하고, 당연히 주어지는 봉급에 책임을 묻고, 회사의 존속을 그들에게 짊어지우면서 소속감을 느끼게 만든다. 그러나 이를 전적으로 믿고 있던 노동자가 다치게 되면, ‘몰랐다’라며 책임을 피하기 일쑤이다. 생계를 위해 일하고자 하는 노동자를 피해자로 전락시키는 이 체계는 얼마나 소모적이고 무책임한가.

⟨섬섬옥수⟩를 지나 두 섹션 뒤에는 조한나 작가의 영상 작업 〈우리 단지〉가 상영되고 있었다.
⟨우리 단지⟩는 작가의 고향인 여수에 관한 이야기이다. 밤바다로 잘 알려진 여수는 사실 거대한 석유화학 산업단지를 품고 있는 곳이며, 이 단지에는 사고에 대한 두려움의 무게와 지역 경제의 축으로서 자본의 무게가 공존한다. 작가의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크고 작은 폭발 사고들이 반복되지만, 작가의 주변인들은 오늘도 여전히 이 산업단지로 출근한다.5
이은희 작가의 작업이 노동사를 톺아보는 통시적 흐름을 가진다면 조한나 작가의 작업 ⟨우리 단지⟩는 고향과 친구들, 가족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기 때문에 좀 더 세세히 서술된다. 여수의 중심 수입원인 산업단지는 작가의 아버지, 친구, 친구의 아버지, 동네 아저씨 등이 모두 출근하는 곳이다.
어릴 적 촬영된 캠코더 영상의 오류로 자신의 어린 시절과 출근한 아버지가 찍은 산업 단지 내부의 풍경이 겹친 것으로 영상은 시작된다. 이는 타국의 먼 공장을 보며 실감하지 못했던 노동의 당사자들이 생각보다 우리 가까이 있음을 실감하게 한다.
이들에게 산업 단지는 평생 트라우마로 남은 폭발 사고가 일어난 두려운 곳이자, 또 동시에 나와 가족을 먹여 살리는 자랑스러운 곳이기도 하다. 작가가 인터뷰한 친구들은 불행하게 그려지지 않는다. 졸업하고, 익숙하고 당연한 곳인 산업단지에 취직해서 돈을 벌며 살아가는 것. 그저 당연한 일상일 뿐이다. 그런 와중에도 ‘꿈’이라는 것에 대해 고민하는 청춘이기도 하다.
흔히 ‘노동자’라는 단어는 작은 프레임에 갇혀 있다. 그 프레임 속의 노동자들은 산업 재해에 고통받아 온 피해자로 동정받는다. 혹은 학업에 실패하거나 능력이 없어 육체노동을 할 수 밖에 없는 실패자, 화이트칼라보다 아래 계급인 블루칼라로 격하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들은 동정받거나 격하될 만한 수동적 대상이 아니다. 그냥 사람이다.
혹시 관람자로서 나는 작품 속 소재로 그들을 대상화하지 않았는지 돌이켜본다. 노동자의 고단함을 그린 영화에는 눈물을 흘리면서 시위로 인해 막히는 도로에서는 화를 내고 있지 않은가? 먼 나라 국민의 목소리는 귀 기울여 듣고, 우리 앞의 외침에는 눈과 귀를 막고 있지는 않은가.
그저 노동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받는 것, 부당한 것에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것, 해로운 것으로부터 몸을 보호하는 것, 잠을 충분히 잘 수 있는 것. 주어를 나로 바꿔보면 당연한 일이기 그지없다.
지금도 공장에 있는 작업등은 꺼지지 않고 돌아가고 있을 것이다.
수십 년을 이어져 온 노동의 악순환이 한순간에 바뀔 리 없다. 너무 빠른 속도는 브레이크를 잡는다고 해도 당장 멈춰지지 않는다. 뭘 해도 완벽할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의 한마디를 더 듣고, 그들이 장갑 한 겹을 더 낄 수 있다면. 조금이나마 따뜻한 온기의 사회가 될 수 있다면. 누구에게나 똑같이 봄이 올 수 있다면.
⟪젊은 모색⟫에서 ‘모색’이란 일이나 사건 따위를 해결할 방법이나 실마리를 더듬어 찾는다는 뜻이다. 대단치 않은 필자가 앞선 무거운 고민의 해결 방법을 찾을 수 있을 리 만무하다.
그러나 그 실마리만이라도 더듬어보고자, 오늘도 손을 앞으로 내어 본다.
IV – 봄,

밤이 안 오는 이곳에도 끝내 봄은 오기를 바라며. 마침.
국 현
gukhyun.studio@gmail.com
- 김유선, 이슈 페이퍼 2025-07-211호, 한국 노동사회연구소, 2025.05.05(통계청 경제활동인구조사 인용) http://klsi.org/bbs/board.php?bo_table=B03&wr_id=2633 ↩︎
- 이혜림, “한국인 수면 시간, 전세계 ‘네 번째’로 짧아… ‘이만큼’ 자면 평균 이하”, 헬스조선, 2025. 02. 19(2025 이케아 수면의 발견 보고서 통계 인용)
https://m.health.chosun.com/svc/news_view.html?contid=2025021902748 ↩︎ - 제 26회 전주 국제영화제 공식 홈페이지, 무색무취, 리뷰에서 발췌 https://www.jeonjufest.kr/db/movieView.asp?idx=5489&reUrl=https%3A%2F%2Fwww%2Ejeonjufest%2Ekr%2FTicket%2Ftimetable%5Fday%2Easp%3FdayNum%3D2 ↩︎
- 이명선, “클린룸과 방진복은 그녀를 보호하지 않았다”, 프레시안 뉴스, 2025. 5. 4
https://v.daum.net/v/20250504145922634
↩︎ - 국립현대미술관 공식 홈페이지, ⟪2025 젊은 모색⟫ 리플렛에서 발췌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