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해는 정오에 가장 높이 떠오르지만 가장 온도가 높은 시간은 오후 2시이다. 계절에 따라 오후 2시는 가장 더운 시간이 되기도 하고, 가장 따뜻한 시간이 되기도 한다. 겨울이 가까워지는 요즘의 오후 2시는 가장 따뜻한 시간이다. 날씨가 추워지고 따뜻함의 소중함을 더 절절히 느끼게 될수록 여러 종류의 따뜻한 것을 찾게 된다. 두꺼운 카디건을 입고, 보일러를 켜고, 오후 2시의 햇빛을 쐬고, 친구와 팔짱을 끼고, 아이스 아메리카노만 고집하던 태도를 꺾고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주문한다. 하지만 우리는 이런 행동으로 물리적인 온도를 높이는 것뿐만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도 따뜻함을 느낄 수 있다. 바로 ‘사랑’이다.
2.
사랑이라니. 너무 센치하고 멜랑콜리한 단어처럼 느껴진다. 평소 시니컬한 태도로 세상을 바라보는 나는 사실 놀랍게도 ‘사랑만물주의자’다. 이 ‘사랑’이라는 단어가 가을을 타서 갑자기 나온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어느 정도는 그럴 수도 있지만. 나는 늘 사랑이 가장 중요한 가치라고 믿는다. 친구와의 사랑이나 우리와 지구를 공유하는 다른 종에 대한 사랑, 미술에 대한 사랑, 기타 사람마다 다른 대상에 대한 사랑이 있겠지만 나는 오늘 우리 엄마의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3.
우리 엄마, 그러니까 박화자 씨는 1965년 인천에서 태어난 여성이다. 35살에 결혼하여 37살에 나를 낳아 그 방식이 옳은지는 모르겠지만 이러나저러나 사랑으로 키웠다. 내가 세상 만물을 사랑하고 또 그만큼의 사랑을 받으며 살아가고 있다지만, 그 어떤 사랑도 박화자 씨가 나에게 준 ‘사랑’에 비할 수 없다.
그녀와 살아온 짧은 평생동안 정말 많은 사랑의 일화가 있다. 어린 시절의 나는 한 가지 습관이 있었는데, 바로 낮잠을 잘 때마다 바닥에서 자는 것이 아니라 그녀의 상체 위에 올라가서 잠을 자던 습관이다. 잘 기억나지는 않지만 그녀는 늘 내가 자신의 가슴에 볼을 대고 완전히 상체에 올라가 잠들었다고 이야기했다. 어렴풋이 그녀의 몸 위에 올라갔던 순간이 떠오르기도 한다. 아마도 어린 나에게는 그녀의 몸이 마치 안전지대처럼 느껴진 것이었으리라. 시간이 흐른 지금, 그녀는 여전히 나를 만나면 내 볼에 뽀뽀를 하거나 내 팔짱을 끼고 걸어 다니고 내 가방이나 쇼핑백 등을 모두 들어준다. 나는 혼자 가구를 옮길 수 있는 건강한 사람으로 자랐지만 그녀의 눈에 나는 여전히 쇼핑백 하나도 버겁다. 아마도 살아가며 온전히 내 몸 하나를 책임지기 위해 지니게 된 삶의 무게를 가방만큼의 무게라도 덜어주기 위한 마음이 아닐까 추측한다.
무던하고 현실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그녀는 예민하고 이상을 좇는 나를 자기 배 아파 낳았지만서도 이해하지 못했다. 그렇지만 어떻게든 나를 이해하기 위해 노력했고, 그녀의 삶에서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던 미술관이나 공연장으로 걸음 하며 나의 세계를 존중해주기 위해 애쓴다. 나 또한 그녀와 내가 기질적으로 다르고 서로를 완벽히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그 누구보다 내 행복을 바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녀와 있으면 안전하다고 느낀다. 그러한 노력과 안전지대로 인식되는 감정들은 그녀가 나를 정말 많이 사랑하고 있음을 알게 한다.
하지만 여기서 그 감정과 감각을 어떻게 수치화할 수 있을까? 그녀가 나를 정말 많이 사랑한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어떻게 내가 받은 수많은 사랑 중에서 그녀가 나에게 주는 사랑이 가장 크다고 확신할 수 있을까? 이런 추상적인 개념을 시각적, 분석적으로 수치화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여겨진다.
4.
하지만 그것을 이미지로 수치화하여 보여주는 작가가 있다. 안민정 작가다.
안민정 작가는 보이지 않는 것을 사람들이 신뢰하는 수학적이고 과학적인 기호를 사용하여 가시화하는 작업을 한다.1 그녀는 본인이 겪은 일화를 배경으로 그 속에 느껴지는 말로 정의할 수 없는 추상적인 감각을 마치 도면처럼 기호와 계산된 도형을 사용하여 해체한다.

작가의 작품 <육인가족도>는 6명의 가족이 모여 어머니가 키우신 알로에를 몸에 바르고 있는 내용과 가족이 모이면 주로 하는 이야기들, 과거에서부터 이어진 관계 등을 담았다.2 하지만 단순히 이미지만 보았을 때는 이것이 어머니를 중심으로 한 가족에 대한 이야기라는 느낌보다는 기계가 작동하는 원리를 담은 설명서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도면이나 기계 설명서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라도 작품 속에 적혀있는 ‘love’라는 단어를 발견한 순간 이것이 이성적이고 객관적인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다. 계산적이고 차갑게 느껴지는 이미지 속에 너무나도 따뜻한 단어를 발견하는 순간 웃음을 짓게 된다. 놀랍게도 한 가지의 따뜻함을 발견함과 동시에 종이의 색마저 미묘하게 따뜻하다고 느껴지기도 한다. 작은 따뜻함이 작품 전체를 감싸안는 것이다.


또 다른 작품 <어머니의 손과 치유의 바람에 관한 연구>에서는 어머니의 손에 대한 사용 설명법을 보여준다. 어머니의 손을 하나의 기계로 보고 그것을 어떻게 사용할 수 있는지에 대해 설명한 것이다. ‘엄마 손은 약손’이라는 속어처럼 어머니의 손은 그 자체로 사랑의 메타포 역할을 한다. 사랑의 메타포로 작동하는 어머니의 ‘손’은 마치 무협영화에서 장풍이 나오는 손처럼 무언가 특별한 기운이나 기능이 있다고 느껴진다. 기계는 작동 방식만 지키면 대상을 가리지 않고 작동한다. 평범한 기계처럼 ‘나’라는 사람이 ‘어머니의 손’이라는 기기를 작동시키기 위해서는 이 매뉴얼에 나온 방식을 따르기만 하면 된다. 하지만 매뉴얼에서는 특별한 이야기가 나오지 않는다. 그저 필요한 준비물은 어머니의 몸과 나의 몸, 어머니의 영혼과 나의 영혼 그러니까 즉 그냥 ‘나’와 ‘어머니’이기만 하면 된다. 사실상 아무런 준비가 필요하지 않은 것이다. 어머니는 내가 ‘나’로 존재하기만 한다면 그녀의 손에서 나오는 따뜻한 사랑과 치유의 기운을 작동시킬 수 있다. 작가의 이 ‘매뉴얼’은 지금도 내 가방을 들어주는 박화자 씨의 손길이 단순한 습관이 아닌 내가 존재하기 때문에 기능하는 하나의 사랑이 담긴 ‘작동 원리’임을 깨닫게 한다.
산업혁명 이후 현대 사회에서 수학적, 과학적 논리는 마치 새로운 ‘종교’와 같은 지위를 갖는다. 그것은 의심할 여지 없이 옳고 정확하며, 유용한 것으로 맹신 되기도 한다. 그에 반해 사랑, 연민, 공감과 같은 감정의 가치는 정반대의 지점에 놓인다. 소위 ‘쿨병’이라는 시니컬한 태도 속에서 타인에게 감정적으로 공명하는 일은 비생산적이고 비논리적이라는 이유로 ‘쓸모없는 것’으로 치부되기 일쑤다. 안민정 작가는 바로 이 아이러니한 간극을 파고든다. 작가는 우리 시대의 ‘종교’가 된 과학과 수학의 문법을 의도적으로 차용한다. 그리고 그 차갑고 이성적인 언어를 사용해 쓸모없다고 외면받는 ‘사랑’의 가치를 가시화한다. 이는 마치 당신들이 가장 신뢰하는 언어로 당신들이 가장 외면하는 가치를 증명해 보이겠다는 말처럼 들린다. 작가는 가장 ‘차가운’ 도구로 가장 ‘따뜻한’ 가치를 번역해 냄으로써 사랑이야말로 이성적 지식만큼이나 숭고하며 그 자체로 우리가 신봉해야 할 또 다른 가치임을 역설한다.
5.
오후 2시는 여전히 가장 따뜻한 시간이다. 겨울의 오후 2시는 태양의 각도도, 공기의 결도, 사람의 마음도 잠시 느슨해지게 만든다. 그 시간의 온도는 단지 기상학적인 수치가 아니라 우리가 서로에게 건네는 마음의 온도이기도 하다. 안민정 작가가 ‘사랑’을 수학의 언어로 시각화했다면 우리는 일상 속에서 그것을 체온으로 번역하며 살아간다. 어머니의 손, 친구의 팔짱, 햇빛에 데워진 공기. 이러한 모든 것들이 오후 2시의 온도를 이룬다. 결국 사랑은 언제나 그렇게 따뜻한 한낮의 온도로 우리 곁에 머문다.
겨울은 모든 생명에게 살아남는 것이 가장 큰 과제가 되는 계절이다. 생명이 살아남기엔 너무나도 가혹한 환경으로 변화한다. 추운 날씨, 자라지 않는 식물, 얼어붙은 물, 짧아진 낮과 길어진 밤. 가혹해진 계절 속에서 생존에 급급해 가장 손쉽게 발견할 수 있는 따뜻함을 놓치지 않길 바란다. 이 글을 읽는 모두가 ‘사랑’으로 오후 2시의 따뜻함을 경험하며 그 속에서 살아남아 무사히 내년 봄을 맞이하길 간절히 기원하며 글을 마친다.
박혜주
uluvme1229@naver.com
- Jeon Nu-ri, 「Who Makes the Invisible Visible」, the argus, 2018, https://www.theargus.org/news/articleView.html?idxno=1419 ↩︎
- 안민정, 「六人家族圖(육인가족도)」, 작가 홈페이지, https://www.myartda.com/current/c_03.html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