튜닝의 끝은 순정

떡볶이, 자동차, MP3

떡볶이가 먹고 싶다. 

읊조림을 들은 이는 자연스럽게 배달 앱을 켜서 메뉴 이름을 부르기 시작한다. 로제 떡볶이, 마라로제 떡볶이, 치킨마라차돌떡볶이 중에 골라봐. 아, 까르보나라베이컨차돌바질떡볶이세트도 맛있겠다. 점점 길어지는 이름은 듣기만 해도 아득해서 도무지 귀에 한 번에 들어오지 않는다. 대답이 없는 것을 보고 상대는 처음부터 다시 읊는다. 로제 떡볶이, 마라로제떡볶이….

아니, 그게 아니다. 그러면 별 찍어 먹는 떡볶이는 어때? 어니언별, 치즈별, 치즈 어니언 별… 이제는 억울해서 치가 떨리고 울음이 날 지경이다. 그냥 떡볶이가 먹고 싶다. 시장 난전에서 철판 위에 끓고 있는, 시간이 갈수록 졸아드는 양념이 퇴근길 발걸음을 붙잡는, 떡과 어묵이 제 모양대로 들어가 있는. 그런데 어디를 봐도 적당한 맛의 떡볶이에 적당한 크기의 야채튀김, 내장 섞은 순대를 적당히 썰어주는 그런 ‘적당한’ 분식집이 없다. 아니, 없어졌다. 대신 떡볶이를 사칭하는 수상한 음식들이 활개를 친다. 아아, 참으로 혼탁한 세상이다.

튜닝의 끝은 순정이라는 말이 있다. 자동차 튜닝 커뮤니티에서 파생된 인터넷 용어이다. 차에 이것저것 부품을 갈아 끼우던 사람들이 애써 조합한 결과보다 처음이 나았다는 사실을 깨닫고 결국에는 원래 상태로 돌아간다는 뜻이다. 필자는 이 말을 참 좋아한다. 자동차에만 쓰기에는 인생사를 통렬한 문장이기에 그렇다.

누구나 언젠가는 순수를 그리워한다. 모든 걸 가진 부자 노인이 갓 태어난 아이의 순수함을 동경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 땅에 태어나 걸음마를 뗀 그 순간부터 우리는 점점 순수로부터 멀어진다. 아무리 때 묻지 않은 어른도 아이와 같을 수는 없다. 순수는 불순으로 변할 수 있지만 그 반대는 불가능하기에 열망하는 것이다.

현대사회는 불순으로 가득 찼다. 여기서 ‘불순’이란 흔히 사용되듯 ‘공손하지 않다’라는 뜻이 아니다. (물론 전보다는 이웃끼리 인사를 안 하는 것 같긴 하다) 국어사전을 빌려 얘기하면 ‘물질 따위가 순수하지 않은 것’이다. 21세기의 오늘은 모든 것이 끊임없이 복잡화되며 개선되고 있다. 단순한 도구 대신 블루투스 기능과 전동 기능을 장착한 기기들이 줄줄이 개발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3.0 버전, 3.5 버전 등 업그레이드된 기능을 가진 버전들이 한 해에도 몇 번씩 출시된다. 산신령이 내민 도끼 중 금도끼 은도끼를 고를 나무꾼은 이제 없다. 콜튼 사의 ‘전기톱 전동 톱 소형 체인 충전식 5,200mAh’를 내밀어도 반응해 줄까 말까 싶다.

모두 ‘업그레이드’된 세상은 얼핏 좋아 보인다. 기술만능주의는 더 발전할 과학기술을 찬란한 모습으로 그려내며 어두운 이면이란 없는 것처럼 장담한다. 그러나 필자의 생각은 다르다. 무서울 정도로 한계를 모르는 발전은 결국 어느 시점부터 사물을 본질로부터 멀어지게 만든다. 다이얼식 전화기, 삐삐에서 발전한 휴대전화는 아이폰을 넘어 아이폰 17까지 출시되었다. 오늘날에는 스마트폰으로 못 하는 걸 찾기가 더 어렵다. 하지만 다양한 기능, 인터넷과 SNS가 발달함에 따라 전화기의 본질이었던 ‘소통’보다는 오히려 비대면 사회에서의 ‘고립’을 만들어냈다.

음식도 마찬가지이다. SNS발 유행에 따라 마라와 로제, 곱창이 유행하던 때도 지나갔다. 이제는 마라와 곱창과 로제를 더한 형체 불명의 음식들이 우수수 개발되고 있다. 끊임없는 유행에 유행을 더하다 보면 그저 각 조합이 이름 순서만 다르게 배치되어 있을 뿐 다른 음식인지도 헷갈릴 정도로 모호한 정체를 가진다. 합성어와 합성어를 합친 말, 파생에서 파생된 것. 흐름이라고 부르기도 어려운 미세한 입자들이 사회를 부유한다. 

최근 대규모 업데이트를 마친 카카오톡은 과도한 기능으로 이제 카카오뉴스헤어샵선물하기인스타그램톡으로 불러야 할 판이다. 각자의 분야에서 시작된 앱들이 결국은 멀티-라는 이름으로 한 지점에 모인다. 모든 기업이 구글이 되고 싶어 한다. 다원화가 계속되고 한 번에 모든 경우의 수를 포함하고자 하니 오히려 몰개성이 된다.

어제는 문득, MP3가 그리워졌다. 스마트폰이 없던 그 시절, 우리는 전화기로 전화하고 컴퓨터로 인터넷 접속을 했다. 그리고 MP3로 음악을 들었다. 기계가 고유의 기능 하나만을 위해 작동하는 것이 어색해질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하던 때였다. 필자가 가진 작은 파란색 MP3는 이모께 물려받은 것이었다. 그마저도 인터넷이 되지 않아 누군가 담아둔 노래만을 무한으로 반복하곤 했다. 선택권은 없었지만, 한 곡 한 곡을 외우다시피 들었는데, 그때를 생각하면 고 신해철의 ‘굿바이 얄리’가 지금도 머릿속에 저음질로 재생된다. 

(1) 서랍 대신 누군가의 질문글에서 발견한 똑같은 모델의 MP3

한참을 찾아봐도 기계가 어디론가 사라진 건지 찾지 못했다. 대신 그 노래라도 듣고 싶어서 핸드폰 음악 앱에 들어가려다가, 상단에 갑자기 뜬 알림에 인스타그램을 접속했다. 메시지를 확인한 후 습관처럼 릴스를 스크롤 하니, 정작 무슨 노래를 듣고 싶었던 건지 잊어버렸다. 그리고 잊어버렸다는 사실 또한 잊은 채로 웹서핑을 하다가 삼십 분 후에야 깨닫고는 조금 슬퍼졌다.

다시 유튜브에 접속해서 노래를 튼다. 아무것도 없이 운율과 나만 존재하던 MP3와는 달리 댓글이 주르륵 달린 영상이 흘러나왔다. 어쩌면 기술이 멀티-화 시킨 것은 기계가 아니라 나 자신일지도 모르겠다.

필름, 현상액, 햇빛

사진 한 장의 두께는 얼마인가?

먼지 쌓인 사진첩을 꺼내본다. 어릴 적 모습이 담겨있는 인화 사진의 용지는 빳빳하고 언뜻 구부러지지 않을 듯도 보이나, 실상은 물에 쉬이 젖고 한 손에 구겨진다. 현상을 해놓고 집안 어딘가에 굴러다니던 필름을 펼쳐본다. 섬세한 필름은 작은 손톱 끝에라도 망가지기 쉽다. 행여 빛이라도 잘못 쐬면 현상하기도 전에 어딘가로 날아가 버리고 만다.

이렇듯 사진은 참으로 유약하고 얇은 형태로 남는다. 그러나 그만한 부피로 단정 짓기에는, 동시에 무엇보다 풍부하고 깊다. 찰칵, 셔터 한 번에 빛에 작은 은 입자들이 반응하며 순간의 모든 것을 기록한다. 가까이 있는 머그잔부터 수백 미터 밖에 보이는 기러기, 제 모습을 차리고 흩어지는 변덕스러운 안개까지. 그야말로 보이는 모든 것을 한 장에 담아낸다. 

아날로그 사진은 재료이자 완성품이라는 독특한 특징을 띤다. 가령 유화 그림의 재료가 물감, 붓, 캔버스이고 이것이 모여서 새로운 작품을 탄생시킨다고 생각해 보자. 필름과 사진기라는 (이제는 근대의 것이 된) 최첨단의 매개체가 필요하긴 하지만, 사진은 빛이 남기고 간 순간, 즉 물리적 형태를 띠지 않는 찰나의 시간에 가깝다. 특히 초기 카메라의 경우에는 그 순간을 바로 눈으로 확인할 수조차 없다. 빛을 받아 사진이 찍히는 데만 해도 몇 시간이 걸리고, 암실에서 현상을 거쳐 인화하는 과정까지 며칠이 지나야 확인할 수 있다. 그렇기에 순간은 촬영과 동시에 포착되며, 그림처럼 임의로 수정하거나 형태를 변형시킬 수 없다. 사진은 그냥 사진이다. 

디지털카메라와 컴퓨터가 등장하며 사진은 또 다른 국면을 맞았다. 필름에서 빛의 매개체로 쓰이던 은 입자들은 디지털 세상에서는 픽셀이 되어 각종 콜라주, 광고, 영상에 인용되며, 불특정 다수에 의해 편집되고 재사용된다. 포토샵을 거치면 이미지는 전혀 다른 결과물이 된다. 한 장뿐인 원료이자 완성품이었던 사진이 무한정으로 복사되는 편리한 재료인 이미지가 된 것이다. 그러나 왜일까? 간단히 찍고 보관할 수 있는 디지털 사진보다 일주일을 넘게 꼬박 기다려야 하는 필름 사진이 더욱 좋은 것은. 그것은 아마 필름에는 하나뿐인 순간이라는 본질이 담겨 있기 때문일 것이다. 

최근 개관한 서울시립 사진 미술관 개관 특별전 ⟪광채 光彩: 시작의 순간들⟫을 마지막 날 다녀왔다. 앞서 상기한 본질을 잘 보여주는 전시였다. 한국 사진이 시작된 1880년 이후 한국에서 사진이 예술로 자리 잡아 온 여정을 톺아본다. 정해창, 이형록, 임석제, 조현두, 박영숙, 5명의 초기 한국 사진작가들을 조명하며 그들 개인이 각각 사진을 통해 어떤 예술을 표현하고자 했는지 다양한 시도를 엿볼 수 있었다.

(2) 이형록, 〈구성〉, 1956, 젤라틴 실버 프린트, 24.46×17.62cm, 서울시립 사진미술관. 사진 출처: 서울시립 사진미술관 공식 사이트
(3) 박영숙, 제목 미상, 1963/2021, 44ⅹ29.8cm, ed. 1/10, 서울시립 사진미술관 소장. 사진 출처: 서울시립 사진미술관 공식 사이트

‘광채’라는 이름과 같이 온통 검은 바탕의 전시장에 들어서면 흑백의 빛과 어둠만으로 이루어진 사진이 걸려있다. 대단한 기술이나 색채 하나 없이 오직 다른 농도의 검정과 하양으로 표현된 이 사진들은 마치 한 폭의 수묵화를 보는 듯 담백하다. 선명도가 높지 않은 사진들은 얼핏 추상화처럼 뭉뚱그려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들의 시선에 포착된 한국은 그 어느 장면보다 사실적으로 드러난다. 혼란스러운 1900년대의 한국, 바삐 움직이는 거리의 사람들. 강한 대비로 인해 표정과 얼굴의 형체가 보이지 않을 정도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 자연스러운 강세로 인물의 감정이 더 잘 느껴진다. 

한국의 초기 사진가들은 비용 문제로 젤라틴을 이용한 프린트 방식을 선호했다. 이 때문에 작품을 실물로 보면 일반 프린트 방식보다 양감이 느껴진다. 미세하게 여백 부분은 종이쪽으로 들어가 있고, 검은 잉크 부분은 팬케이크 위에 시럽을 뿌린 것처럼 부피감과 광택감을 가진다. 마치 창 너머로 누군가를 엿보는 것 같은 정도의 은은한 입체감이다. 진하다 못해 깊은 농도의 검은색, 물에 먹을 한 방울 탄 듯한 회색빛 음영은 새벽 아궁이 불을 쬐는 것 같은 안온한 온도를 피부로 전하는 듯하다.

현재 지구상에서 가장 고해상도인 카메라는 화소가 자그마치 32억이라고 한다. 달 표면을 샅샅이 볼 수 있는 천체 망원 카메라이다. 최신 기술로 셔터속도를 고성능으로 높여 새가 먹이를 낚아채 물방울이 튀어 오르는 그 찰나를 담아낸 사진도 보았다. 그러나 대단한 절경이 아닌 평범한 일상을 찍은 손바닥만 한 이 흑백 사진이 왜 더 가슴을 울리는 건지, 필자는 괜히 전시장 구석에 서서 운동화로 바닥을 끌며 생각해야 했다.

눈으로 보면 아름다운 장면이 막상 카메라에는 담기지 않아 아쉬울 때가 있다. 분명 벅찰 정도로 좋은데, 카메라로 담아서 보면 이상하게 밋밋하고 평면적으로 느껴진다. 아마 이는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이 뇌의 인식에 따라 어떤 부분은 생략되고 흐리게 왜곡되기 때문일 것이다.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 흐린 부분은 주관적인 우리의 상상으로 채워지기 때문에 오히려 선명해진다.

필자가 전시장에서 목격한 누런 빛이 도는 이 흑백 사진들의 여백도 마찬가지였다. 여백은 잉크가 묻어나지 않은 빈 부분이 아니라 작품 위에 생각으로 덧그릴 수 있는 도화지였다. 그 도화지 위에 새드엔딩도 해피엔딩도 그려보면서, 그 시절의 순간을 함께 꿈꾸었다. 집으로 돌아왔을 때 사진이 남은 곳이 머리가 아니라 마음이었기 때문에, 그토록 또렷한 감정이 느껴진 이유를 그제야 알 수 있었다.

종이, 오리, 먹

미대 입시를 준비하던 해, 필자는 한 가지 병을 앓았다. 바로 ‘여백 공포증’이라는 것인데, 빈 종이만 보면 무엇을 그려야 할지 몰라 진땀이 나는 게 그 증상이었다. 그려놓은 인물에서 하얀색으로 비는 부분이 나오거나, 종이 한 곳이 크게 비어 보이면 안 되는 입시 미술의 기술적 규칙에 따라, 당시 그림이란 시간 내에 최대한 꽉 차게 종이를 채우는 행위에 가까웠다. 대학을 입학하고 서양미술사를 배우면서는, 르네상스 시대의 서양화 양식에 따라 그림을 그려보고 싶어졌다.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을 가득 메운 인물들처럼 세밀한 붓질로 큰 캔버스를 채우는 연습을 했다. 그뿐만 아니다. 작품 속에 갖은 함의와 은유를 심어 놓고 긴 문장으로 풀어 작가 노트를 빼곡히 채웠다. 뭐든 채우는 것이 좋다고, 안타깝게도 그때는 굳게 믿었다.

이 증상이 차도를 보인 것은 불과 얼마 전이다. 한 아트 페어에서 이강소 작가의 그림을 보았다. 형형색색의 작품들과 군중들 속에 자리한 하얀 캔버스, 그 위에 그어진 선 몇 마디는 고고한 학 같았다. 동서양을 불문하고 좋은 작품은 가타부타 말이 필요 없다. 마주하는 순간 알 수 있다.

(4) 이강소, 청명-18214, 2018, Acrylic on canvas, 112 x 145 cm

한국 현대미술의 거장이자 실험 예술, 사진, 판화, 조각, 회화 등 다양한 매체를 넘나드는 이강소 작가는 1975년 제9회 파리 비엔날레에서 선보인 무제 75031, 닭 퍼포먼스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전시장 바닥 한가운데에 말뚝을 세워 주위에 회분을 깔아 놓고, 닭의 다리를 끈으로 묶어 말뚝에 연결했다. 비엔날레 동안 살아 움직이는 닭이 고정된 굴레 안에서 회분으로 남기는 발자국이 그 작품이었다.(5) 작가의 의도가 아닌 행동반경 내에서 닭이 만들어내는 움직임을 결과로 순응하는 것이다.. 이후 그는 동양철학 사상을 바탕으로 회화 작업을 이어 왔다. 본능적이고 자유로운 붓놀림으로 배, 오리, 사슴 등을 그려낸 그림들이다. 막상 작품을 보면 형상과 의도가 명확해 보이지 않는다. 이 선들이 정확히 어떤 물체를 그린 건지 딱 꼬집어 규정할 수 없다. 판단은 보는 이의 몫이다.

한국화에서의 여백은 빈 공간 이상의 의미가 있다. 비어 있는 공간이 있기 때문에 채움이 채워질 수 있고, 여백 자체도 기가 살아 움직이는 공간이다. 마치 주전자 속 차를 다 마시지 않고 다음 사람을 위해 남겨두는 것처럼, 옛 선조들은 감상자의 사유를 위한 여백을 남겨두었다. 빈 여백 위에 복잡한 사물을 한 번의 먹선으로 표현한 것은 무모할 정도의 대담함까지 느껴진다. 이는 대상을 선명한 표현으로 묘사하며 배경까지 꽉 채우는 서양의 미와는 또 다른 미학이다. 말을 줄이고, 그림을 비우고, 획을 덜어낼수록 그 자리에 본질이 자리한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일까?

순정으로 돌아가는 것은 어쩌면 변화하는 것보다 더 큰 용기가 필요하다. 혼란스러운 주변에 흔들리지 않는 여유가 있어야 비로소 모든 것을 비우고 본질을 채울 수 있다. 그러나 더 깊이 사유하기 위해서는 겉포장을 덜어내고 순수의 상태를 마주해야 한다. 초속 약 30만 km로 주행하는 첨단의 세상에서, 가끔은 머리를 비워내고 마음을 채워보는 것은 어떤가.

아래는 독자님들을 위한 사유의 공백이다.

1 사진 출처: 레딧 게시글 

https://www.reddit.com/r/IpodClassic/comments/x2lmqk/ipod_nano_whats_wrong_with_the_screen_it_works/?tl=ko

2 사진 출처: 서울시립 미술관 공식 홈페이지

3 사진 출처: 위와 같음

4 사진 출처: 키아프 서울 공식 홈페이지 “이강소: 몽유” 갤러리 현대 https://kiaf.org/insights/5441

5 현대화랑 공식 홈페이지, ‘작가 :이강소’
https://www.hyundaihwarang.com/?c=artist&s=1&gbn=slider&gp=1&ix=131

국 현

gukhyunstudio.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