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군 신화와 박혁거세 신화처럼, 세상에는 수많은 탄생 신화가 존재한다. 그리고 나의 탄생도 부모님에게만큼은 하나의 신화이자 동화였다. 엄마는 지금도 나의 태몽을 자랑스럽게 이야기한다. 한여름의 붉은 사과, 그리고 새하얀 말.
골목 어귀 과일 트럭에서 아주 새빨갛고 싱싱한 사과를 골라 콧노래 부르며 집으로 돌아갔다는 이야기.
푸른 초원 건강한 말들이 힘차게 줄지은 끝에 반짝이는 갈기를 가진 새하얀 말이 서 있었고 엄마가 그 아래에 누워 겉잠에 들었다는 이야기.
그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나는 뽀얀 얼굴에 붉은 뺨을 가진 백설 공주형 얼굴로 태어나야 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하곤 했지만 굳이 엄마에게 그 말을 꺼내 보지는 않았다. 나는 그런 것하고는 전혀 관련이 없으며 이 부분은 엄마를 닮아서이지 않을까… 하는 추측을 하기 때문이다. 하하 엄마 미안.
어른이 된 나는 밝은 톤의 파운데이션과 선홍빛 볼터치로 백옥 같고 수줍은 얼굴을 꿈꾸기는 하지만 선크림을 바르지 않고도 운동장 위를 곧장 다섯 바퀴는 뛰어놀던 나의 유년 시절을 좋아한다. 그리하여 구릿빛 피부를 유지해 온 나를 좋아한다. 나는 한여름의 붉은 사과, 그리고 빛나는 하얀 말. 윤기 나는 사람이 되어야지 그래. 한여름의 태양 같은 사람이 되어 그렇게 나의 태몽을 증명하겠노라. 세상과 나의 필연적 만남을 증명하겠노라. 태몽은 그런 짧은 상상을 해보게 한다.
나는 카메라 앞에서 울지도 않고 척척 포즈를 취하는 아이였다고 한다. 어머, 연예인 시켜야겠어요. 종류의 말을 듣는 아이. 엄마는 영웅담을 말하듯 종종 내 어린 시절 이야기를 나에게 반복해서 말한다. 사진관 아저씨가 얼마나 감탄했는지 내 사진을 뽑아 가게 유리문 안에 걸었는데, 걸려있던 사진 중 내 사진이 가장 큰 사진이었다는 것이다. 엄마 아빠는 그날, 내 사진만 가득한 두꺼운 가죽 표지의 앨범을 결제했다. 나는 그 앨범을 틈틈이 펼쳐보았다. 어떤 사진이 있는지 속속들이 다 알고 있었지만, 그 영웅담을 들으면 쉽게 볼 수 없는 사진을 떠올리려는 듯 기억이 가물가물해졌다.
‘사진이 어땠더라?’
내가 도대체 얼마나 대단한 포즈를 취했는지 기대하며 그 위대한 명화를 넘겨 본다. 한 페이지, 두 페이지, 내가 보기엔 그저 그런 아기 사진 뿐이라 볼 때마다 소리 내서 ‘에이~’ 하고 중얼거리곤 하는데 엄마는 언제나 그 사진이 평범하지 않다고 반박할 준비가 되어있다. 그러면 또 그런 거 같기도 하다.
어머, 연예인 시켜야겠어요. 라는 말을 듣던 아이가 배우가 되겠다고 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더 자란 나는 쑥스러움이 제법 많다. 순수 純粹, ‘대상 그 자체에 전혀 이질적인 잡것의 섞임이 없음.’ 가끔 가죽 표지 앨범 속 맑은 얼굴을 떠올리곤 한다. 나는 어떻게 섞이고 뒤척였기에 이리 낯을 가리게 되었을까. 카메라 앞에서 어색한 브이를 참을 수가 없다. 낯선 사람들 틈에서 내 이야기를 할 때면 말더더드듬이가 되곤 한다. 간헐적 용기가 생겨 때로는 외향형 인간인 줄 알았다는 말을 들을 때도 있지만, 그런 말을 들을 때 뛸 듯이 기쁜 나는 외향형을 꿈꾸는 내향형 인간이다. 아주 소란스러운 내면에 비해 입 밖으로 나오는 말은 단순하고 형편없다. 가끔은 말을 할 줄 모르는 사람이 된 것 같다. 무엇을 느꼈고, 무엇을 배웠고, 무엇을 읽었고, 무엇을 보았고. 말하지 못하면 내 것이 아니라고? 그런 핀잔을 들을 때마다 그렇다면 이 혼란한 내면은 도대체 누구의 것이지? 그런 생각을 하곤 한다.
불순한 나의 것이지. 순수의 반의어가 불순이란다. 이왕 그렇다면 불순의 극단으로 치닫고 싶다. 그러면 나를 불순으로 다시 정의 내릴 수 있게 될 테니까. 슈붕파도 팥붕파도 아닌 나는 꼭 두 마리를 잡아 하나씩 번갈아 맛봐야 하고, 배스킨라빈스 써리원은 가짓수가 너무 많다. 키오스크 앞에 서면 10분은 고민해야 하는, 사실 뒷사람만 없다면 30분이고 한 시간이고 고민했을 느린 나는 참 애매한 나다. 그래서 말도 그리 잘하지 못하는 것이다. 다듬고 또 다듬고 깎아내고 털어내도 내 진심은 금방 말하기가 어렵고 뱉어내고 떼어내질 못한다. 그냥 실없이 헤헤거리기를 택하다가도 때론 그조차 안 나와 벙어리가 되고, 서두르면 진심이 아닌 말하기가 불쑥 피크를 찍기도 한다. 그래서 어물쩍, 말하기보다 쓰기를 택할 때가 많다.
자간에 머물기를 좋아한다.
음성 없는 침묵의 공간에서 누구보다 치열하게 존재하는 글자들의 아우성 또는 공백은 강요할 줄 모른다.
존재할 줄을 안다.
수많은 기호와 철자와 자음과 모음 속에 둘러싸여 있기를 좋아한다.
창이 크게 뚫린 도서관을 좋아한다.
거기 진득하게 앉아 태양의 움직임을 관찰하는 것을 좋아한다.
그 움직임을 느꼈을 때 휴대폰 나침반을 켜 이리저리 돌려보곤 한다.
나는 옳은 방향으로 이동하고 있을까 하는 철학적인 질문도 빼놓지 않는다.
나는 불순의 끝에 다다르는 연습을 한다. 비전형적 화술을 가지고 싶다. 나는 당신을 당혹스럽게 하고 싶다. 불필요하다 치부되는 소음을 구태여 뒤적거려 오래된 쇳소리를 긁어오고, 고장 난 텔레비전의 전파 잡음을 떼어오려 한다. 어느 잡지에서는 이런 욕망을 ‘삶을 너무나 사랑해서 기존의 문장으로 삶을 진부하게 표현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징후’라고 표현했다. 그들의 언어를 빌려 그 글자들 틈에서 내 마음과 꼭 맞는 어느 부분을 가져와 내어 보인다. 같은 문장을 읽고 덮고 다시 펴고 읽고 또 읊조린다. 가슴이 뛴다. 그러면 심장을 겨누는 음절의 좌우가 펜촉이 되어 기억을 스치고 또 다른 음절을 낳는다. 그렇게 우선은 쓰는 사람이 되어본다. 인용은 나의 불순 不順 연습이다. 타인의 글에 나의 자음과 모음을 덧붙인다. 내 생각만으로는 아무 효과가 없을 것 같아서. 내 생각만이라면 무심해하고 불필요해하고 초라해질 것 같아서. 때로는 내 마음을 나도 알 수 없어서. 수많은 다른 쓰는 이의 글을 빌려와 그 옆에 조심스레 내 마음을 끄적여본다. 그렇게 내 마음을 정의하는 법을 연습한다.
내가 그런 사람이기에 연기를 사랑하나 싶다. 연기를 통하면 말하지 못하는 나도, 말하고 싶은 나도 조금은 자신 있게 존재할 수 있는 것 같다. 타인의 글들 사이에 숨어 내가 존재하는 것처럼 말이다. 내 마음을 이해해 줘. 정의해줘. 알아 봐줘. 나는 그렇게 연기에 기대어 본다. 지독한 짝사랑 중이다. 하지만 언젠가 그 품에 꼭 안겨야지. 그렇게 천천히 너도 나에게, 나도 너에게 말을 걸게 되기를 기다린다. 급해지지 말자, 나는 원래 느리다.
요즘은 어느 연애 프로그램을 본다. 여기 사람들은 죄다 자기를 정의할 줄 아는 것 같다. 연애 프로그램답게 어떤 사람이 이상형이냐는 질문부터, 무슨 음식을 좋아하고, 어떤 여행을 좋아하며, 어떤 방식의 사랑을 해왔는지, 그 이유가 무엇인지, 그런 질문들이 나열된다. 누군가가 나에게 그런 질문을 건네는 상상을 한다. 뭐라고 대답했을까? 나는 간단한 질문에도 신중해져 버리고 만다. 이게 좋아? 아님 저게 좋아? 이게 좋아. 라고 했는데 나중에 저게 좋아지면 어떡하지? 그럴 수도 있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한다는 건 내가 저걸 좋아한다는 뜻일지도 모르지. 겉으로 보기에는 내가 이걸 좋아하는 사람인 것 같은데, 사실 난 저것도 좋아하는 사람인 것 같아. 1초, 2초, 3초… 아차, 이제 말을 해야지. 뭐라고? 뭐라고 말하지? 음… 이렇게 되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나는 나를 더 모르겠다. 결국 이거나 저거 중에 하나를 얼렁뚱땅 이야기 해두고, 마음속에는 언제나 설명 못 한 응어리가 있다.
어찌 됐건 나는 그 프로그램에 등장하는, 자기가 누구인지 아는 (그들 또한 나와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을지언정, 그렇게 보이는) 또렷한 사람들이 부러웠나 보다. 나는 요즘 취향이 확고한 사람이 되려고 한다. 툭 누르면 내가 좋아하는 게 무엇인지, 왜 좋아하는지를 와다다 쏟아낼 줄 아는 사람이 되고 싶다. 물어봐 주기만을 기다렸다는 듯이 그 이유를 쏟아내고 싶다. 그래서 눈에 불을 키고 좋아하는 것을 찾는 중이다. 그러자 아, 맞아 내가 이걸 좋아하는구나. 그런 순간들이 더 많아졌다. 그러니 그냥 지나가지 못하고 행복해져버리는 순간도 더 많아졌다.
– 취향이 확고한 사람이 되려는 노력을 좋아하는 중이다.
아무도 안 물어보길래 그냥 내가 먼저 말한다. 이것 좀 봐볼래? 이 패딩은 그냥 무지 회색 패딩처럼 보이겠지만 달라. 이건 뒷면에 세로선이 섞여 있어. 보통 패딩은 가로로 선이 많잖아? 이 패딩은 바로 이 세로선이 마음에 들어서 구매로 이어졌다고 할 수 있지. 자, 이 볼펜을 봐. 2,500원짜리 평범한 볼펜이긴 하지만, 이건 무려 갈색 잉크야. 이 갈색 잉크에서 낡은 책 냄새가 날 것 같다고 해야 하나? 그래서 샀어. 그러면 보통 ‘안물안궁’ 혹은 ‘얘왜저래’ 표정을 짓거나 착한 사람이라면 ‘정말 그러네’ 정도의 대답을 해주더라. 그 반응을 견디는 것까지가 내 몫이다.
취향이라는 건 씩씩해야 지킬 수 있다. 씩씩한 사람이 되고 싶다. 그렇다면 여기서 또 씩씩한 사람을 정의해본다. 나에게 씩씩한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내 생각에 그건 한겨울에 길을 걸어가며 쭈쭈바 아이스크림을 맨손으로 먹을 수 있는 사람. 그것도 빨개진 손으로 땅땅 얼어붙은 아이스크림을 꾹꾹 눌러가며 짜 먹을 수 있는 사람이다. 이 글을 쓰는 11월 말, 제법 추운 오늘 나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그걸 해냈다. 녹은 아이스크림을 마지막 한 방울까지 탈탈 털어먹고는 의기양양해져서 아, 이거구나 싶더라.
‘어때, 나 씩씩하지?’
겨울 이것도 참 별거 아니네. 그런 생각을 하는 내가 사실 좀 바보 같기도 했는데, 나 오늘 또 한 가지를 정의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에 대견하다고 말해주었다.
인용하고, 정의하고, 연기하며 살아가기로 한다. 그렇게 나는 또렷한 불순으로 향하는 법을 연구하고 있다.
연극이 오고 갈 때면 정현종 시인의 ‘방문객’이 떠오른다. 사람이 온다는 건 그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 한 일생이 오는 것이라고 했다. 그 마음이 오는 것이라고 했다. 어느 날 연습실 앞에서 사람들을 마주하기 직전 그 생각이 시작됐다.
‘사람이 오는 건 한 세계가 오는 것과 같다는 말이 정말인가 보다.’
연극이 나에게 사람을 보낸다. 수많은 세계를 보낸다. 한 편의 연극을 하면 다른 세상에 다녀오는 것 같다. 한켠 꿈을 꾼 것 같다. 한 편의 태몽 같다. 동료들이, 인물들이 신화처럼, 동화처럼 뚜벅뚜벅 다가와 나에게 자리 잡는다. 연극이 끝나면 그 세계에서 깨어나야 하지만, 다시 내 세계로 돌아와 혼자 앉아야 하지만, 너무 외로워하지 않아도 된다. 그때가 비로소 태어나는 시점이기 때문이다. (라고 나를 달래본다)
틀림없이 자랄 것이다. 나는 여전한 사람이지만, 그러다가도 꼭 나아가곤 했으니까. 결국 섞이고 어울리며 자라는 것이 불순이 아닌가. 당신의 문장과 나의 문장이 엮이는 것이 불순이 아닌가. 애정을 갖는 일에, 애정을 받는 일에 잔뜩 소속하고 싶다. 그리하여 내가 시끄러운 사람이 되기를. 그 소음을 기꺼이 들켜 누군가에게 공고히 탐독 되기를, 정성껏 인용되기를. 또 한 권의 두꺼운 가죽 표지 앨범이 되고, 그 밖에서 또 다른 내가 태어나기를.
나는 오늘도 삶을 너무나 사랑해서 전형적 문장으로 삶을 진부하게 표현하고 만다. 나아가자고, 나아가자고, 더 나은 사람이 되자고. 그걸 다짐하는 진부한 사람이 되어 한 글자국 나아가려 한다.
이유민
wouldyu@naver.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