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라는 말은 참 어렵다.
‘너’와 ‘나’라는 날 때부터 동떨어진 존재들이 어떻게 한순간에 ‘우리’로 변모하는가? 또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를 우리이고 그렇지 않은 나머지로 규정할 수 있을까. 깊이 생각해 보니 단어 자체가 안개로 쓴 듯 두루뭉술하다. 아마 필자가 사전을 집필한다면 뜻을 한 문장으로 서술하기 어렵기에 제일 골머리를 썩일 단어일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존재한다. ‘우리 엄마, 우리 집, 우리나라 ‘는 ‘내 엄마, 내 집, 내 나라’보다는 왠지 모르게 10도 정도는 더 따뜻하게 느껴진다. 후자는 다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의 것이라는 표현인데도 그렇다. ‘우리 지구를 위해 함께 힘을 모으자’‘우리 가족은 할 수 있다’, 어떤 경우에는 ‘우리’로 수식하는 것만으로 말이 힘을 얻기도 한다.
그러나 개인주의가 팽배한 작금의 현대사회에서 본래 의미의 ‘우리’는 사어가 되버린 듯 하다. 너와 내가 마음을 나누고 하나가 되는 것은 판타지 소설에나 나올 법한 이야기가 되어버린지 오래이다.
아마 근대에는 단체가 모여 하나의 뜻을 이루는 것이 가능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현대에는 복잡화되었고 각 개인의 개성과 성향을 존중해야하기에 이런 방식의 연대가 어려워졌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마음을 모아 전쟁을 막거나 환경 오염을 늦추는 움직임은 계속되고 있으며, 여전히 필요하다. 그렇지만 오늘날 무작정 한 가지의 가치를 강요하며 좌중을 하나로 모으는 것은 연대보다는 폭력으로 인식될 수 있다.
애초에 다양한 이해관계를 가진 사람들을 어떠한 기준으로 다르고 같은 편이라고 판단할 수 있을까? 스크롤을 할 때마다 새로고침으로 시차가 바뀌는 SNS에서는 일 초에도 수억 개의 정보가 업데이트된다. 한 사람의 계정이라고 별반 다르지 않다. 어제의 생각은 오늘의 흐름에 따라 급변한다. 누구나 때에 따라 다른 입장의 누군가가 될 수 있다. 텍스트의 바다에서 일관성을 찾는 것은 어찌 보면 우스운 일이다.
각각의 개인도 정체성을 확립하지 못하는데 하물며 공동체는 어떨까. 정치 집단, 하물며 국가도 크고 작은 이권에 따라 입장을 손바닥 뒤집듯 뒤집는다. 이에 동의하지 못하는 개인은 집단을 하나로 만드는 것을 막는 균열이 된다. 달리 생각해 보면 집단은 하나일 수가 없다. 애초에 완벽한 일체에 금이 간 것이 아니라 제각기 모양 다른 입자들을 압력으로 쥐어 잠시 그런 척했을 뿐이다.
프란츠 카프카의 소설 [공동체]에서는 ‘하나’의 아이러니를 간단하게 보여준다. 우연히 한 집에서 나온 다섯 사람은 공동체를 이루고 살고 있다. 이유나 조건은 없다. 그들은 공동체이기 때문에 공동체이다. 그러나 여섯 번째 사람이 여기 들어오고자 하는 순간 그들은 외부인을 막으려 하나로 똘똘 뭉친다. 여섯 번째 사람은 이전의 다섯 명과 다를 바 없지만, 단지 그가 여섯 번째이기 때문에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분명 구성원들은 내부에 있는 자신들만이 공동체라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공동체를 만드는 결정적인 구성원은 오히려 외부인인 그 여섯 번째 사람일 수도 있다.
다섯 사람은 여섯 번째 사람을 배제하려고 애씀으로써 공동체를 이룬다. 서로 단합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닌 배제를 위한 공동체이다. 잠깐의 소속감과 위안을 줄 뿐 진정 함께하는 것이라고 보기 어렵다. 안타깝게도 현대 사회의 연대 중 대다수는 이런 표면적인 관계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어떤 ‘연대’가 진정한 ‘우리’인 것일까?
두 개의 진흙 덩어리를 붙이는 방법
도예의 기초를 배우다 보면 꼭 만들게 되는 물건이 있다. 손잡이가 달린 물컵이다. 얼핏 간단해 보이지만 두 개의 기물을 하나로 만드는 것은 기술이 필요하다. 한창 도예 수업을 듣던 때의 필자는 각각 아름다운 형태의 컵과 손잡이 모양을 만들었다. 완성이 된 거라 짐작하고 바로 두 매끄러운 덩어리를 하나로 합쳤다. 그러나 삼 초도 버티지 못하고 손잡이가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슬립 앤 스코어’란 도예에서 점토 두 조각을 결합하는 데 사용되는 기술이다. 견고하게 합치기 위해서는 먼저 점토 표면에 흠집을 내야 한다. 매끄러운 표면은 서로 잘 붙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다음 물과 점토를 섞은 액체 혼합물을 표면에 발라 접착력을 높인다. 약간에 압력을 가하여 두 점토를 붙이면 비로소 한 덩어리가 된다.1
하나로 만들기 위해서는 먼저 온전한 기물 두 개를 훼손해야 한다. 어찌 보면 충격적인 진행 방식이지만, 이 과정은 우리가 지향해야 할 연대와 닮았다. 서로 다른 개인을 무작정 압력으로 누른다고 하나가 되지는 않는다. 서로의 불완전함을 인정하고, 비어 있는 틈을 만들어 끌어안아야 비로소 함께할 수 있다. 이를테면 나무 도구의 날로 파고들듯이 긁어낸 것들이 더 잘 붙는 거처럼 말이다.
연대는 깔끔한 용접이 아니다. 두 덩어리의 틈을 메꾸는 것은 질척거리는 감정들이다. 태어나 죽기까지 우리의 순간은 모두 다르다. 아마 같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토록 다른 우리를 잠시나마 같은 선상에 서게 만드는 것은 나도 그럴 수 있다는 공감과 유대감이다.
그러나 이 공감과 유대감이라는 것은 듣기에는 아름다우나 현실에서는 도무지 감이 잘 오지 않는 이야기다. 필자가 좋아하는 영화로 예를 들어볼까 한다.
2018년 개봉한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 <어느 가족>에는 피가 하나도 섞이지 않은 한 이상한 가족이 나온다. 아무 연고 없는 할머니의 연금 수당에 빌붙어 사는 남녀와 여학생, 남자아이로 구성된 가족이다.
남자아이의 부모뻘인 남녀는 자신을 엄마와 아빠로 지칭하며, 비록 그 수단이 슈퍼에서 물건을 슬쩍 하는 것이라 할지라도 아이를 먹이고 입혀왔다. 몇 년 전 친부모에게 방치된 채 주차장 속에 있던 아이를 주워 왔지만(이 영화에서는 훔치다가 와 줍는다는 정의가 구별되지 않는 특성이 있다), 오히려 선택했기에 진짜 가족이라고 자랑스럽게 주장한다.

영화는 가족이 친부모로부터의 학대와 방임을 당하는 한 여자아이를 목격하고 다시 집으로 데려오는 데서부터 전개된다. 남자아이는 제가 배웠던 것처럼 생존 방법을 가르치고, 어른들은 새 옷을 훔쳐다 입힌다. 사회의 기준에서 보자면 그들은 가족이 아니라 납치범, 범죄자이다. 그러나 아이는 더 이상 매를 맞지 않고, 사랑하기 때문에 때린다는 친모의 말도 거짓말임을 배운다. 이불에 실수를 해도 죄송하다는 말 대신 소금을 먹는다.
경찰과 정부 조사관 앞에서는 서로를 모르는 체하고, 남겨 두고 도망칠 만큼 느슨해 보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가족이 아닌 것은 아니다. 서로의 아픔을 누구보다 잘 알고, 결핍을 보듬어 주는 것에서부터 대체 불가한 공동체가 된다. 영화의 끝에서 그들은 처음부터 같이 있지 않았던 것처럼 쉽게 와해한다. 하지만 관객에게 오히려 제도와 혈연으로 묶인 것이 아니라 감정을 공유한 그들이 오히려 진짜 가족이지 않을까 하는 의문을 안긴다.
영화는 내내 습도가 높다. 밥상 위에 튄 엄지발톱처럼 찝찝하기도 하다. 그러나 가족은 서로의 결핍을 마주 보고 함께 몸을 구겨 살아냈기에 딱 붙어서 떨어지질 않는다.
우리의 연대는 응집된 단결과 행동력을 보이는, 그러나 개인이 없는 근대의 연대에서 벗어나 개인의 의견을 존중하게 되는 발전을 거듭해 왔다. 사회의 변화에 따라 이제는 다음 단계로 넘어갈 시점이 되었다. 누군가는 너무 피상적인 이야기라 말할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언젠가는 의견과 논리로 갈라치기보다는 상대방을 끌어안는 ‘우리’가 되기를 꿈꾼다.
국 현
gukhyun.studio@gmail.com
- Wheel&clay, “What Is Slip & Score?”
Kristen, June 30, 2023
https://wheelandclay.com/blog/slip-and-score-clay/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