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North Korean construction workers at a building site. Image source: Naver Blog, Ga-yeok-bul-i (家驛不二).
1
조금은 거친 표현을 써서 보태자면, 요즘은 멍청한 사람이 너무 많다. 여기서 멍청함은 지능이나 학력, 소득이나 계층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멍청함이란, 문명 속에서 살아가며 다수가 만들어준 혜택은 누리면서, 그에 상응하는 책임이나 비용은 치르지 않으려는 태도다.
누군가는 그런 태도를 흔히 ‘이기적’이고 ‘교활하다’고도 부른다. 교(狡)와 활(猾)에서 교(狡)는 길조, 활(猾)은 흉조를 상징하며 길흉이 항상 동반해 반복되는 것을 의미한다. 앞서 언급한 ‘멍청하다’는 의미와는 조금은 다른 뉘앙스로 들릴 지 모르지만, 이러한 인간들이 도처에서 무슨 모습으로 어떠한 영향을 주는지 상기해보면 ‘교활함’의 정의를 곱씹어 볼 수 있을 것이다.
불과 어제의 일이었다. 도로 위의 횡단보도를 건너는 연세가 지긋한 할머니와 이를 바라보는 차량 운전자가 있었다. 알맞는 신호에 길을 건너고 있음에도, 운전자는 자신의 시간이 낭비되었다고 느꼈는지 경적을 여럿 차례 울리며 빨리 건너라고 압박하는 모습을 목격했다. 할머니는 그제서야 놀라서 부랴부랴 아픈 몸을 이끌고 최대한 속도를 내며 건너편으로 걸음을 옮기고 있었고, 운전자는 신호가 바뀌기 무섭게 속도를 내며 사라졌다.
「몸이 편찮아 보이시는데, 늦게 건널 수도 있는거 아닌가? 저렇게 클락션까지 울릴 일인가?」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멍청한 사람’들은 나보고 이렇게들 말할 것이다.
「너나 잘해.」
「내 상관이야?」
「선비 같네.」
어제의 일과는 별개로, 종종 주변 인물들에게서 이와 비슷한 반응을 느낀 적이 있었다. 그런걸 겪다보면 사뭇 ‘내가 멍청한 건가?’ 라거나 ‘이기적으로 사는 게 똑똑한 건가?’ 싶은, 스스로를 향한 의심을 하게 된다. 또 한 가지 조금은 다른 예시를 들어보겠다.
이를테면 학교 생활을 하면서 실습실이나 교실 등의 공동 공간과 공용 물건을 사용하는 사람이 여럿 있을 때, 매번 본인의 자리만을 청소하거나, 본인의 자리 반경에 널부러져 있는 쓰레기를 보고 ‘내 것’이 아니라며 지나치는 사람 A, 이로 인해 피해를 당해왔던 B, 한편, 항상 묵묵히 앞서 공동 공간을 정리하고 타인을 배려해왔던 C가 있다고 가정해보자.
「아니, 왜 내가 버린 쓰레기도 아니고, 내가 어지럽힌 것도 아닌데 왜 치워야해?」
B의 생각은 이러했다. 그럴 수 있다. 맞는 말이다. 무책임한 A로 인해 이유 없는 피해를 봤으니 말이다.
그러나 구성원의 대부분이 B와 같이 생각한다면 어떨까?
사용자의 출처가 애매하거나 알 수 없는 공용의 물건들은 사라지거나 망가지고, 공동 공간들은 점점 더 더러워질 것이다. 각 개인의 이해득실만을 고려한 집단 생활은 결코 집단이 될 수 없다. 기필코 균열이 가거나, 심하게는 갈등으로 번진다.
B는 C에게 이렇게 말한다.
「아니, 왜 너가 버린 쓰레기도 아니고, 너가 어지럽힌 것도 아닌데 왜 항상 너가 치우고 있는거야?」
혹은
「넌 억울하지도 않냐? 이렇게 항상 해줘도 모른다니까.」
라고 말이다. 이 역시 틀린 말은 아닐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거기에 있다.
운전자와 A같은 부류의 인간은 진심으로 타인을 배려하는 것이 손해라고 생각한다. 타인을 고려하지 않고 이기적으로 행동하는 것만이 똑똑한 삶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가장 큰 문제는, 이러한 언행이 피해를 당해온 B처럼, 혹은 꾸준히 배려를 해온 C와 같은 사람들로 하여금 ‘호구’라고 생각이 들게끔 물들인다는 것이다.
당신이 나와 같은 시점에서 이 상황을 마주보고 있었다면, 무슨 감정을 느꼈을 것 같은가? 그들처럼 이기적으로 살지 않는 것이 정말 호구 같고 멍청해서 그런 걸까?
2
국내의 한 유튜브 크리에이터가, 필자가 겪거나 예시로 제시한 현상을 사회심리학 논문을 통해 분석한 바가 있어 소개해보겠다.
이는 프린스턴, 로렌스, UCLA 대학교의 심리학자들이 작성한 논문인데, 사람들이 왜 특정 대상에게 편견을 갖게 되는지, 그리고 편견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이 어떤 공통적인 특징을 가지는지를 연구했다. 이 논문은 수많은 편견을 단 두 가지 기준으로 분류할 수 있다고 말하는데, 바로 ‘능력’과 ‘따뜻함’이라고 한다.
심리학자가 언급하기를, 많은 편견은 다음 세 가지 중 하나로 나뉜다.
- 낮은 능력 + 높은 따뜻함 → 연민
- 높은 능력 + 낮은 따뜻함 → 질투
- 낮은 능력 + 낮은 따뜻함 → 경멸
조금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해보자면, 능력은 보통 사회적 지위와 연결되며,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사람일수록 능력이 높다고 인식된다.
따뜻함은 경쟁과 관련이 있다. 우리는 경쟁할 필요가 없는 대상에게는 따뜻함을 느끼고, 경쟁해야 하는 대상에게는 냉담함, 그리고 적대심을 느낀다.
그래서 능력이 높지만 경쟁해야 하는 대상에게는 차갑다고 느끼고 질투를 느끼게 되며, 논문에서는 유대인이 그 예로 언급된다. 반대로 능력이 낮고 경쟁할 필요가 없는 대상에게는 연민을 느낀다. 논문 속 예시는 노인이다.
그렇다면 결론적으로 경멸의 대상은 누구일까? 바로 능력도 낮고, 따뜻함도 낮은 대상이다.
3
앞서 ‘멍청함’과 ‘교활함’에 대해 언급하며 예시를 들었다. 내가 말한 그들은 셋 중 어디에 해당할까?
그렇다. 바로 경멸의 대상이다. 그들은 낮은 능력과 낮은 따뜻함을 특징으로 한다. 먼저 ‘낮은 따뜻함’은 ‘그 사람과 경쟁해야 할 때 느끼는 감정’이라고 언급했다. 앞서 예시로 제시한 A로 인해 피해를 본 B의 대사를 상기해보자.
「아니, 왜 내가 버린 쓰레기도 아니고, 내가 어지럽힌 것도 아닌데 왜 치워야해?」
쉽게 말해서, ‘똥은 네가 싸는데 치우는 건 왜 내가 해야 하냐’ 라는 말이다. 그들의 이기적인 행동으로 인해 발생한 결과는 대부분 다른 사람들이 책임지게 된다.
우리 사회의 자원은 한정되어 있다. 돈, 시간, 그리고 개인적인 감정 마저 모두 그렇다. 사회 구성원들은 이 한정된 자원을 잘 분배해야만 한다. 그런데 교활하고 멍청하며 이기적인 사람들이 그 자원을 자기 마음대로 가져가버리면, 남은 사람들끼리는 더 치열하게 경쟁해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에게 냉담함을 느끼게 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4 그렇다면 이런 반문이 생길 수 있다.
「자기 이익을 최우선으로 하는 그들이 왜 능력이 낮다는 거야?」
앞서 말했듯 능력은 사회적 지위와 연결된다. 그리고 사회적 지위는 사람들이 만들어주는 것이다. 사람들은 그들과 같은 행동을 하는 사람을 결코 인정해주지 않을 뿐더러 능력 있다고 느끼지도 않는다.
문명화된 사회에서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능력은 문명 사회가 어떻게 만들어지고 유지되는지 이해하는 능력이다. 인간은 이를 본능적으로 직감하고 몸소 알고 있다. 그 근거는 문명을 벗어나 홀로 선 인간은 정말 나약하다는 것이다.
반대로 말해서, 문명에서 벗어난 인간은 나약하고, 나는 지금 다수가 만들어낸 문명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마땅히 배려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연대(連帶)이자 연대 의식인 것이다.
내 옆에 있는 이름도 모르는 사람들 덕분에 문명은 만들어지고 유지된다. 당장 창문을 열면 보이는 무수한 신호등과 도로, 건물. 결코 한 사람이 지은 것이 아니다. 아무리 세금을 잘 내도 그 세금을 내는 사람이 혼자였다면 문명은 만들어질 수 없다. 비바람이 몰아치는 날에도 가족들과 식사를 나눌 수 있는 것도, 할머니와 운전자 모두 신호등을 보고 안전하게 길을 건널 수 있는 것도, 법이라는 것이 존재하는 것도 모두 다수가 모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이 모든 것이 돈의 문제라고 반문한다면, 아무리 규격 외의 부자라 할지라도 혼자의 힘으로 지금 모든 인류가 누리는 문명의 수준을 만들어내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라고 단언한다.
5
교(狡)와 활(猾)에서 교(狡)는 길조, 활(猾)은 흉조를 상징하며 길흉이 항상 동반해 반복되는 것을 의미한다. 내가 한 이기적인 행동이 개인이나 특정 누군가들에겐 이득이 될 수 있어도, 반드시 이에 상응하는 피해를 보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여전히 그들은 ‘이기적인 자신이 똑똑한 것’이고 ‘배려하는 너희들이 손해보는 호구’라며 여길 것이다.
물론 그들을 교화할 목적으로 작성한 글은 아니다. 다만 앞서 언급한 크리에이터 역시 분석을 마치며, 누군가를 배려하고 양보하며 이해하려는 스스로를 ‘바보인가’ 하고 의심해온 사람들에게 짧은 말을 건넨다.
「당신은 바보가 아닙니다.」
그렇다. 배려를 할 줄 안다는 것은, 인간이 어떻게 문명을 이루었고 그 문명을 어떻게 이용하고 있는지를 정확히 이해한 똑똑한 사람인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문명 사회의 순리와 작동 원리를 이해한 것을 기저에 두고 있다면, 그 ‘배려’ 란 선택의 베품이 아니라 마땅히 치러야 하는 값인 것임을 인지하게 된다.
다시 말해, 배려라는 것이 괜히 쑥스럽고, 어색하고, 과한 용기라고 생각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그것은 문명 속에서 향유하는 모든 것에 대한 대가를 치르는 것이니까.
6
나는 무책임한 A도, 염세적인 B도 되고 싶지 않다. 그저 C처럼 그냥 하고 싶다. 그렇게 생각했던 이유는, 나 역시도 살며 A와 B처럼 생각해왔던 적이 있었고, 지금도 종종 그렇고, 그런 상황 속에서 끊임없이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자책해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앞으로 C가 되기를 바란다는 것은, 상응하는 무수한 변명과 고착된 편견 속에서 끊임없이 싸워야만한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근래 2025년을 지내면서, 내게 가장 많은 변화는 다름 아닌 인간관계였다. 가장 오래된 친구와도 멀어지기도 하고, 전혀 닿을 것 같지 않던 사람들과 다양하게 친분을 쌓기도 했다. 때로는 뜻하지 않은 오해를 낳기도 하고, 어쩔땐 오해를 하여 스스로 상처를 받기도 했다. 그 와중에 언제나 ‘이 관계에서 내가 뭘 잘못하고 있을까’를 정말 많이 고민했던 시기였다.
그 끝에 이르러 지금에 와 생각해보니, 한편으로는 내가 정말 이기적으로 생각했구나 싶었다. 상대방의 좋은 점만을 찾고 품으려는, 나의 좋은 점만을 보여주려는, 보이는 단점은 대개 배척하고, 지적하고자 했다. 사람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양가적이고도 입체적인 존재라는 것을 간과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에게도 상대방에게도 좋은 점이 있다는 것은, 그에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단점이 있다. 다수와 함께 살아가며 겪는 불편함은 다수와 함께 살아가기에 가능한 편리함과 함께 따라온다.
좋은 것만 누릴 수는 결코 없다는 것을 끊임없이 인지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잊고 살아왔음에 반성했다.
이토록 불완전하지만서도 필연적인 것이 연대다. 불완전하고 연약하기 때문에 이어짐을 놓지 않으려하고, 그 이어짐이 있었기에 지금의 너와 나, 그리고 우리가 있다. 연대의 본질은 그 양가적인 관계에 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이를 잊지 않고 내 방식대로 실천해나가는 것, 설령 다시 이기적이고 멍청한 판단에 이르더라도 곧바로 제자리로 돌아올 수 있는 것, 그것에 있다.
7

홀로 선 인간은 나약하다. 다만 지성을 지닌 인간은 유대를 맺고 이윽고 연대(連帶)를 지닌 인류(人類)가 되어 문명을 거듭 일궈냈다. 어찌 되었던, 우리는 지금 위대한 위인들과 이름 모를 무수한 다수가 이루어낸 문명의 혜택을 누리고 향유하며 살아가고 있다.
다만, 우리는 때때로 이기적인 인간들을 마주하곤 한다. 그 비겁함과 이기적인 것이 사소하던 크든, 다수가 이뤄낸 문명 속에서 살고 그 혜택을 누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땅한 책임감과 인륜적인 도덕성 없이 행동하는 걸 목격하곤 한다.
향유 속에는 마땅함이 있다. 당연하다고 누려왔던 이 모든 것들이 당연한 것이 아님을 알고 마땅한 책임감을 갖고 있다면, 서로에게 마땅히 건네는 이해와 배려는 우리 사회를 분명 더욱 똑똑하고 다정하게끔 만들어 줄 것이다. 그 다정함은 이기주의자들이 손해(損害)다, 멍청하다고 말하는 어리석은 행동 같은 것이 아니다.
필연적으로 문명을 향유하며 살아오고 있는 우리가 그것을 일궈낸 것이 홀로 선 인간이 아닌 다수의 유대에 있음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에, 도리에 어긋나는 이기적인 행동을 결코 하지 않는 마땅함에 있다. 되려 어리석은 것은 그 다수의 감사함을 모른 채 마땅한 값을 회피하고, 자기 이익만을 꾀하려는 그들이지 않을까. 그들이 그토록 꾀하고 싶던 능력과 명예는 다수의 인정이 만든다. 비겁하고 이기적인 그들을 마음속 깊이 인정할 다수는 아무도 없다.
홀로 선 인간은 나약하다. 인간은 유대(紐帶)와 연대(連帶)를 맺은 인류(人類)로서 그 점을 극복했다. 그렇기에 모든 걸 혼자서 짊어질 필요가 없다. 타인에 대한 배려와 이해가 어리석다고 생각할 이유도, 기꺼이 손을 내밀어보지 않을 이유도 없다. 우리 사회에 그 따스하고도 다정한 마음을 품고 있는 사람들이 부디 흔들리지 않고 계속해서 함께할 수 있기를 바란다.
Bibliography
Susan T. Fiske, Amy J. C. Cuddy, Peter Glick, Jun Xu “A Model of (Often Mixed) Stereotype Content: Competence and Warmth” Journal of Personality and Social Psychology, 2002
소중한
towertvoll@gmail.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