곁에 남아있다는 것은

이해해. 그럴 수 있지. 어쩔 수 없었겠다.

 나는 이 말을 종종, 아니 꽤 자주 내뱉는다. 어느 날은 내게 납득할 수 없는 말을 한 친구에게 용서라는 이름으로, 또 어떤 날은 생각지도 못한 행동을 한 누군가에게 위로라는 이름으로.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이해한다는 그 말은 상대를 위해서라기보다는, 더 이상 깊이 생각하고 싶지 않았던 나를 위한 말이었을지도 모른다.

이해는 관계를 유지하는 데 유용한 말이다. 상대를 몰아붙이지 않으며 상황을 정리할 수 있는 유용한 말. 하지만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이해는 연대의 출발점이 아니라 종착점에 서기도 한다. 이해한다고 말하는 순간 나는 더 이상 묻지 않아도 된다.

 이승우의 단편 소설 「사람들은 자기 집에 무엇이 있는지도 모른다」에서 여동생은 집 안에 다른 존재와 함께 산다고 말한다. 그러자 여동생의 오빠와 그녀의 남편은 그녀를 착란과 정신병에 시달린다고 결론 내린다. 여동생의 경험은 사실 여부를 따질 기회조차 얻지 못한 채, 납득 가능한 세계 속으로 정리되며 이해를 대신하는 판단만이 너무나도 빠르게 이루어진다. 병리적 진단은 설명처럼 보이지만, 실은 더 이상 그녀의 삶에 대해 개입하지 않겠다는 말이다.

 소설 속 ‘이해한다’는 말은 받아들이겠다는 뜻이 아니라, 설명할 수 없는 세계를 설명 가능한 범주로 옮겨 판단을 종결하겠다는 선언에 가깝다. 그녀의 경험을 ‘병적 증상’으로 정리하는 순간, 더 이상 알 수도 없고 끝내 납득할 수도 없는 그녀만의 세상에 머물 필요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이름 붙이기는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세계를 닫는 방식이기도 하다. 우리는 그렇게 타인의 세계를 빠르게 축소시키고, 그것을 ‘이해한다’고 말한다.

이해할 수 없는 타인의 세계 앞에 서 있는 일은 생각보다 힘들다. 그래서 우리는 ‘이해한다’는 말로 한발 물러난다. 그러나 연대는 바로 그 물러남이 아니라, 물러나지 않으려는 선택에서 시작되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해를 유예한 채 타인의 세계 앞에 남아 있는 일은 무어라고 부를 수 있을까. 나는 그것을 연대라고 부르고 싶다.

 연대는 타인을 완전히 이해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해하지 못했음에도 곁에 남아 있으려는 선택이다. 납득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그 세계로부터 도망치지 않는 것. 설명되지 않는 말들을 곧장 판단하지 않고 잠시 보류하는 일. 연대는 유예의 시간 속에서 존재한다. 그 시간은 불편하고, 비효율적이며, 때로는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한 채 끝나기도 한다.

 물론 유예의 시간이 언제나 윤리적인 것은 아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유예는 응답을 미루는 방관도, 이해한 척 곁에 머무는 태도도 아니다. 이해할 수 없다는 이유로 관계를 정리하거나, 판단을 숨긴 채 관계를 유지하는 순간, ‘우리’는 ‘그들’로 나뉜다. ‘그들’의 세계는 더 이상 나와 함께 있을 필요가 없는 것으로 정리된다. 그것은 판단을 보류하는 일이 아니라, 판단을 숨긴 채 관계를 유지하는 방식이다. 내가 말하는 유예는 판단을 보류한 채, 그 세계로부터 도망치지 않는 선택에 가깝다.

 내가 용서와 위로라는 이름으로 쉽게 내뱉었던 이해 한다는 말은, 그러니까, 정작 이해하려 하지 않겠다는 의미와 다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연대는 이해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인정한 이후에야 비로소 시작될 수 있다. 이해할 수 없다는 이유로 관계를 정리하지 않겠다는 선택, 설명되지 않는 세계 앞에서 질문을 멈추지 않겠다는 결심, 그 불편함을 견디며 곁에 남아 있겠다는 다짐. 내가 생각하는 연대는 그 지점에 더 가깝다.

 그래서 연대는 언제나 불완전하다. 서로의 경험을 온전히 공유하지도 못하고, 같은 언어로 말하지도 못한다. 여기에서 말하는 ‘같은 언어’란, 충분히 이해했다고 느끼는 순간에도 그 이해가 끝내 타인에게 닿지는 못한다는 지점에 가깝다. 우리는 아무리 애써도 타인의 삶 안으로 완전히 스며들 수는 없다. 그 사람이 내가 되는 일은 끝내 일어날 수 없다.

그럼에도 연대는 계속된다. 완전한 이해가 아니라, 이해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배제하지 않겠다는 약속 위에서.

 우리는 종종 ‘이해한다’는 말로 연대를 대신한다. 그러나 그 말이 질문을 멈추게 하고, 타인의 세계를 설명 가능한 범주로 정리하는 순간, 연대는 이미 끝난다. 연대는 이해의 실패를 감당하려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나는 여전히 이해한다고 말하면서도 이해하지 못한다. 연대를 말할 자격이 내게 있는지 끝내 확신하지도 못한다. 그럼에도 연대를 포기할 수 없다면, 그것은 이해하지 못한 채로 머무는 이 불편함을 끝까지 견디겠다는 선택이겠지.

원동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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