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2월 – 화이트를 망치기 싫었어요
새 스케줄러를 샀다. 괜히 샀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스케줄러라는 물건은 그냥 할 일이 아니라, 그럴듯한 ‘스케줄’을 적어야 할 것 같지 않나? 그래서 늘 줄 노트에 적당히 적어 왔는데, 프리랜서가 되고 나서는 상황이 달라졌다. 줄 노트로는 감당이 안 되는 일정들이 생각보다 빨리 생겼다. 그래서 하나 장만했다. 가장 먼저 돈 들어오는 날을 적었다. 다음은 마감날. 명시된 날짜보다 하루 앞당겨 적었다. 실력이 부족하면 서비스로 승부한다는, 초보 프리랜서의 영업 방식이다. (이럴 때면 직장인이 부러워지기도 한다. 직장인은 월급일이 정해져 있을 테니까. 앵벌이는 돈 들어오는 날이 매번 다르다는 점이 가장 귀찮다)
전체적으로 하얬다. 딱 봐도 잘 설계된 디자인이었다. 채우지 않아도 완벽하도록 조정된 얼굴. 그래서 내가 끼어들 자리가 없다는 점이 문제였다. 이 완성품에 끼얹는 한 해는, 아주 완벽해야만 할 것처럼 느껴졌다. 대충 살아도 될 나이는 이미 지났다는 것을 내게 담담하게 알려주는, 무섭도록 하얀 감각이었다.
이 공백 덩어리는, 그러니까 화이트 덩어리는 내게 ‘아직 올해를 망치지 않았다는 증거’처럼 다가왔다.
텅 빈 날들을 마주하니 고흐의 말이 떠올랐다. “화가에게 가장 두려운 것은 텅 빈 캔버스다.” 나만의 생각이지만, 텅 빈 캔버스가 두려운 이유는 그것이 그 자체로도 이미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인 것 같다. 가만히 있어도 되는 천과 나무를 굳이 붙여서 캔버스를 만들어냈다. 오직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 그렇다면 그 결과는 최소한 ‘아무것도 안 한 상태’ 보다는 나아야 하겠지. 그래서 텅 비어있는 이 하얀 스케줄러를 함부로 더럽히고 싶지 않았다. 어설프게 시작하느니, 차라리 비어 있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동시에, 나에게는 스케줄러가 꼭 필요했다. 잠시 빤히 응시하다가, 어차피 써야 한다면 의미 있는 것으로 채우자고 마음먹는다. 텅 빈 캔버스에 뛰어드는 화가처럼, 텅 빈 스케줄러에 뛰어드는 당찬 프리랜서가 되겠다. 신년에 대한 기대라기보다는, 이 완성된 공백을 함부로 대하지 않겠다는 마음이 신년 다짐이 된 셈이다. 2025년의 12월 말, 새 스케줄러도 아직 경험하지 않은 시간도 전부 화이트다.
2026년 1월 2일 – 망쳤나?
1월 1일은 공휴일이니까 비어 있어도 괜찮았다. 아직 공휴일을 비우는 것만으로 불안해질 만큼 심각한 정신상태는 아니다. 문제는 1월 2일이었다. 화이트에 처음 손을 대는 날이었으니까. 정말로 의미 있는 일을 해야만 할 것 같았다. 대청소나 작업 같은 것들. 그러다 약속이 잡혔다. 왕복 세 시간의 홍대, 그곳에서 우리가 하기로 한 건 ‘내 맘대로 폰 케이스 꾸미기 체험’이었다. 솔직히 별로 내키지 않았다. 애플이 열심히 만들어놓은 디자인을 그대로 즐길 수 있는 투명 케이스를 두고 왜 만 구천 원을 내야 하는지! 하지만 좋아하는 친구가 하고 싶어 하는 일이었고, 한겨울에 밖을 돌아다니는 것보다는 나아 보였다.
폰 케이스 외에도 내맘대로 슬라임, 내맘대로 모루 인형, 내맘대로 탑꾸 등 세상에서 가장 쓸모없어 보이는 것들을 내맘대로 꾸미는 공간이었다. 점원은 “컨셉만 정하시고 시작하시면 쉬워요”라고 말했지만, 나는 속으로 소리쳤다.
제발 나한테 컨셉 정하라고 하지 마!!
나는 투명 케이스가 제일 좋다고!!!!
어떻게 해도 괜찮아 보일 색의 비즈를 골랐다. 보라색, 분홍색, 그리고 화이트. 화이트는 소생템이다. 망한 그림도 화이트 한 번 얹으면 그럴듯해진다. 입시 미술이 내게 가르쳐준 몇 안 되는 진실 중 하나였다. 화이트라는 완벽한 보험이 생겼으니 이제는 테이블 위에 놓인 투명 케이스를, 또 하나의 화이트를 바라본다. ‘뭐라도 해야 한다’는 마음이, 아직 실패가 아닌 영역을 침범하기 시작했다.

내가 더럽힌 화이트. 보험을 너무 믿었나?
이상했다. 내가 이걸 즐기고 있었다. 입으로는 친구와 세상에 대해 씹어대고, (요즘은 두바이 쫀득 쿠키 욕한다) 손으로는 구슬을 올리고 있었다. 결과물은 솔직히 별로 예쁘지 않았다. 너무 정신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즐거웠다. 이걸 할 시간에 작업을 했다면 돈을 벌었을 텐데도, 이상하게 즐거웠다.
세 시간쯤 지났을 때, 나는 처음으로 긍정적인 말을 입 밖으로 냈다.
“야… 이거 왜 이렇게 즐겁지? 하등 쓸모없는 일인데 왜 즐겁지?”
친구가 웃으며 말했다.
“평가받지 않는 창작활동은 원래 다 즐거워.”
그러니까 나는, ‘아직 경험하지 않은 시간’이라는 인생의 하얀 면을, 2026년의 첫 영업일을 의미 있게 보내고 싶었던 사람이다. 그런데 새해 두 번째 날부터 아무 쓸모도 없는 데코덴으로 완벽한 투명 케이스를 망치고 있었다. 가방에 키링도 두 개 초과로 안 다는 내가 말이다.
2026년 1월 6일 – 그럴 수도 있지 싶어요 나는
그날 놀아서 3, 4, 5일 내내 일만 했다. 정말 괴로웠다.
그런데 이상하게 1월 2일을 떠올리면 즐겁다. 계획한 방향의 1월 2일은 아니었으며, 나답지도 않았고, 숫자로 표현할 수 있는 성과나 성장 같은 건 더더욱 없었는데도.
만 구천 원 주고 산 ‘평가받지 않는 창작활동의 즐거움’이 생각보다 오래간다. 그 과정에 녹아있는 즐거움이, 스스로를 무시하지 말라고 내게 소리친다. 세속적인 이유만으로 신년 시작을 실패라고 명명한다면, 그날 태어난 즐거움이 너무 허망해질 것만 같다.
그래서 한 번 더 나답지 않게 굴어보기로 했다. 한 번쯤 더 쓸데없는 즐거움을 누려 보려고.
두바이 쫀득 쿠키를 사러 가야겠다.
11시에 문 여는 카페의 두쫀쿠가 11시 30분에 매진되는 풍경 같은 것들에, 나는 잘 공감할 수가 없다. 그래서 더더욱 두쫀쿠다.
내일은 친구랑 아침으로 국밥을 먹고,
그 쓸데없는 걸 사러 줄을 서기로 했다.
그래, 나의 첫날은 프리랜서다운 시작은 아니었다.
내일도 아닐 테다.
그러면 어쩔 건데. 화이트는 아직 359일이나 남아 있다.
1월 8일 – 여담
감기에 걸렸다. 어제 야외에서 세 시간이나 웨이팅을 한 탓이다.
두쫀쿠 웨이팅이었냐고?
아니.
국밥집 웨이팅이었다. 열한 시 오픈인 집에, 열 시 반에 가서 웨이팅 걸었다.
그런데 우리 앞에 33팀이 이미 있었다. 하하!
기다리는 동안 겸사겸사 두쫀쿠나 사러 갔다. 그건 또 웨이팅이 없더라고, 황당하게.
벌겋게 얼어서 덜덜 떨리는 두 손으로 쪼그려 앉아 두쫀쿠를 먹었다.
맛있었다.
국밥집 입장 직전에는 친구한테 화냈다.
세 시간 기다렸는데 맛없으면 가게에 불 지르고 너 죽인 다음에 나 자살할 거임. 이랬다.
그런데 들어가서 국물 한 입 먹으니까,
그냥 그 모든 게 가치 있는 것 같이 느껴지더라.
황당한 하루였다.
돌이켜 보면 즐거웠고.
신소영
rubysnow@naver.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