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는 권력

1 Robert Ryman, Attendant, 1984. Oil on fiberglass with aluminum, bolts, and screws 51 7/8 × 47 × 2 1/8 in. (131.8 × 119.4 × 5.4 cm) Anne and Sid Bass Fund, The Museum of Modern Art (MoMA) Collection © 2019 Robert Ryman. Most of his paintings were predominantly white. However, Ryman consistently emphasized that they were not intended as “white paintings.” Rather, he described them as paintings in which white was used to allow other things to become visible. 

덧대고, 긁고, 다시 덧대고, 닦아내기. 적지 않은 수의 가벽과 좌대, 조형물의 온전한 화이트(white)를 위해서 수 없이 반복한 일들이다. 이 일은 끝이 없다. ‘처음’의 전제로 돌아가기 위해서 의식적으로 행할 뿐이다. 그러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화이트(white)는 왜 전제일까. 왜 흔적을 숨기고, 드러내려 하지 않고, 중립성으로 위장하는 것일까. 배경(background)으로서의 기준값으로 작동되는 그것이 꼭 순수하고 결점없는 화이트(white)여야만 할까. 

돌이켜보면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흰 여백의 바탕 위에서 시작하는 일이 흔하지 않던가. 혹은 레드(red)와 블루(blue)를 정치의 이분법적 색으로 읽지만 화이트(white)는 아무도 의심하지 않는다. 이런 저런 생각이 교차하면서 화이트(white)가 지닌 보이지 않는 권력에 대해서 유심히 들여다보게 되며, 한편으로는 그것이 다른 전제로 작동될 때, 우리가 사유할 수 있는 지점을 상상해보았다. 그것이 제법 합리적인 상상일지, 터무니 없는 망상일지는 거리를 두고 지켜보아야 하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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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대개 화이트(white)를 ‘비어 있음(empty)(空)’으로 간주한다. 중립성으로 위장된 화이트는 

객관적인 시각 언어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현대 사회에서 화이트는 언제나 기준값이 되어왔다. 예컨대, 많은 미술관의 흰 벽, 문서의 흰 여백은 내용(Contents)과 맥락(Context)이 담기기 이전의 배경으로 존재한다. 이렇듯 화이트는 강제하지 않고 명령하지 않으며, 눈에 띄지 않는 방식으로 기준처럼 작동하는 보편적 권력인 것이다. 

화이트(white)라는 언어로부터 파생되는 ‘깨끗하다’, ‘정리되어 있다’, ‘불필요한 게 없다’는 표현은 미학이자 윤리적 판단으로 읽힌다. 예컨대, 폭력적 권력은 강제되며, 이데올로기는 설득을 기반한다.
다른 권력 형태의 차이를 면밀히 살펴보자면, 화이트는 강제도 설득도 아닌 전제에 가깝다는 점에서 동의도, 저항도 발생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어쩌면 우리는 ‘무언가를 본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화이트 위에서만 볼 수 있도록 훈련되어 있는 걸지도 모른다. 흰 벽, 흰 캔버스, 흰 종이는 각각 정상적이고 깨끗한 전시 공간이자, 올바른 출발점이고, 정리된 상태라고 일컫는다. 이는 한편으로 화이트 자체가 자연스레 기준값이 되고, 그다지 규칙을 설명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화이트큐브는 사물이 지닌 역사적 맥락, 사회적 조건, 제작 환경을 제거한다. 이러한 소거가 중립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특정한 독해 방식만 허용하고 있는 것이다. 화이트는 외부와의 경계를 명확히 하고 노이즈를 최소화하여, 인간의 감각을 안정시키고 미적 판단을 돕지만, 그렇기에 비로소 화이트큐브 내 작가나 큐레이터는 의도와 비의도, 사이에서 끊임없이 선택하고 싸워야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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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대는 단 하나의 기준으로 읽히지 않는 대상과 가치들이 병존하는 상태에 놓여 있다. 그럼에도 사회는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일시적 보편을 설정하고, 이를 반복적으로 조정하며 규율을 가다듬는다. 보편은 자연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반복과 관습을 통해 학습되고 내면화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화이트는 여전히 중립을 가장하고 있으나, 그 중립이 과연 누구에게 편안하게 작동하는지는 충분히 질문되지 않고 있다. 달리 말해, 대개 화이트는 의심의 여지가 없어왔다. 그러나 다원적 가치가 강조되는 오늘날의 쟁점은, 화이트가 여전히 보편적 전제이자 바탕으로 기능할 수 있는가이며, 화이트큐브 역시 동일한 쟁점에서 논의되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를 기저에 두어 전제를 재정리해보고, 그것이 과연 유효하며 합리적인지 갑론을박이 오갈 수 있기를 바란다. 

  1. 화이트를 거부할 것인가. 
  2. 화이트를 어떻게 노출시킬 것인가.
  3. 화이트 외적인 감각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 

A

화이트를 전면적으로 배제하거나 부정하는 태도는 어떠한가? 이는 화이트를 여전히 중심축으로 둔 채 반대편에 서는 방식이다. 이 경우, 화이트는 여전히 기준으로 남고 다른 감각은 예외나 저항으로만 규정된다. 따라서 화이트를 무효화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렇다면 논의는 보이지 않는 권력인 화이트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노출시키는 것에 있다.  

2 Michael Asher, Untitled, 1993. Stone, 100 × 190 × 40cm, © Michael Ash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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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개 화이트 큐브의 벽을 깨끗하게 관리하기 위해 구멍을 매꾸거나 요철을 정리하고, 그 위에 페인트를 덧칠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화이트를 배재한 다른 색으로 벽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화이트를 배경으로 유지한 채 벽의 얼룩이나 설치 흔적, 혹은 조명의 불균형으로 인한 그림자 같은 요소를 숨기지 않는 것에 있다. 이로서 화이트가 온전한 기준값으로부터 관리 및 통제의 과정과 결과를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방식을 취해보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접근은 작품의 가독성이나 맥락을 해친다는 합리적인 반론을 동반할 수 있다. 그러나 가독성은 중립적인 기준이 아닌 화이트 큐브의 규범 속에서 학습된 감각의 결과다. 벽의 얼룩이나 설치 흔적, 조명의 불균형은 작품을 방해하는 요소가 아니라, 그동안 보이지 않도록 관리되어 온 전시의 조건을 드러낸다. 이는 작품의 맥락을 흐리는 것이 아니라, 작품이 놓이는 환경과 제도적 장치를 감상의 의도적으로 포함시키는 시도로 읽을 수 있다. 명료함을 약화시키는 대신, 감상의 책임을 관객에게 되돌려주는, 관객을 보호 받는 소비자에서 조건을 인식하는 주체로 전환하는 방식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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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트는 항상 요동치지 않는 전제이자 중립적인 태도를 취해왔다. 이는 엄연히 명시해두지는 않았을지라도, 실제로는 특정한 언어만 허용해왔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를테면, 화이트큐브 내에서의 작품은 자율적이며, 공간은 빈 배경일 뿐이다. 감상은 개인적이고 내적인 경험이며, 제도는 개입하지 않는다. 이러한 형식적인 전제는 서문에 적혀있지 않더라도, 공간의 구성과 규칙을 통해 항상 작동되고 있다. 따라서 화이트가 지닌 ‘중립’은 침묵이 아니라, 비가시적인 문법으로 보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화이트큐브 공간이 숨겨왔던 규칙·전제·조건을 언어화함으로서 화이트가 주체성을 갖도록 해야한다. 이를테면, 작품 옆에 최소한의 캡션과 벽에서 분리된 설명문, 혹은 정보가 QR코드나 리플렛으로 대체되어 시야에서 최대한 배제되도록 했던 것이 기존의 방식이라면, 벽면에 직접 텍스트를 삽입하거나, 작품과 무관해 보이는 문장을 배치하고, 전시 규칙과 조명 조건, 관리 지침을 직접적으로 노출 시키는 것이다. 

‘이 2F 구역의 온도는 작품 보존을 기준으로 설정되었다.’

‘이 벽은 2025년 1월 17일 오후 6시에 재도장되었다.’

‘관객의 이동은 이 동선을 기준으로 유도된다.’

이로서 화이트큐브가 스스로의 작동 방식을 발화하도록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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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도적 언어를 필요 최소한으로 감추는 기존의 전략을 뒤집는다. 규정, 안전 가이드, 보험 조건, 설치 매뉴얼, 관리 기준과 같은 언어들은 작품을 보호하는 동시에 작품을 규정해온 장치다. 이 언어들을 작품과 동일한 가시성으로 배치함으로써, 작품이 제도와 분리된 자율적 대상이 아니었음을 드러낸다. 이를 통해 작품이 놓이는 조건을 감상의 일부로서 재배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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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설명과 전시 조건을 분리하지 않는다. 작품 설명 옆에 제작비, 설치 시간, 승인 절차를 병기하거나, 작품과 함께 조명 각도, 벽면 재질, 공간 규격을 명시하고, 작가의 발화와 제도의 언어를 병치한다. 이로써 의미는 더 이상 작품 내부에 고정된 속성이 아니라, 조건 속에서 발생하는 사건으로 전환된다. 

C

마지막으로 이러한 전략들은 배경을 전경으로 끌어오는 데에 목적이 있다. 벽, 바닥, 공기, 조명, 동선과 같은 요소들은 기존 전시에서 배경으로 취급되어 왔지만, 이 요소들이 감상의 중심으로 이동할 때 작품은 오직 홀로 존재하는 대상이 아니라, 공간과 조건에 의존하는 사건으로 인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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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 지점에서 몇 가지 오해 내지는 반문이 예상된다. 우선 ‘설명이 과도해지는 것은 아닌가’에 대한 이야기다. 이 개입은 작품을 더 잘 이해시키기 위한 설명이 아니다. 의미를 전달하거나 해석을 안내하려는 목적도 없다. 대신 관객의 시야에서 자연스럽게 배제되어온 규칙, 즉 무엇이 전시로 인정되고 어떤 방식이 표준으로 작동해왔는지를 드러내는 행위다. 설명처럼 보이는 형식은 이해를 위한 도구라기 보다는 보이지 않던 권력을 드러내기 위한 장치라고 볼 수 있다. 

한편으로는 ‘미학적 몰입을 방해하지 않는가’에 대한 이야기다. 여기서 문제는 몰입의 방해 여부가 아니다. 되려 ‘몰입이란 무엇에 대한 몰입인가’를 다시 묻는 데 의의가 있다. 기존의 전시는 관객이 작업 내부에만 시선을 고정하도록 훈련해왔다. 작업이 공간과 조응하는 큐레이션을 택하더라도, 다시금 작업 중심으로 환원된다. 이 개입은 그 시선을 작업 너머로 확장시켜, 작업이 놓이는 조건과 전시가 구성되는 방식 자체를 인식의 대상으로 끌어온다. 몰입은 해체되지 않는다. 다만 대상이 이동하며, 감상의 층위가 재배치된다고 볼 수 있다. 관객은 결과물 뿐만 아니라 그 결과가 가능해진 구조 속으로 진입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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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Michael Asher Claire Copley Gallery Exhibition, 1974. © Michael Asher. Los Angeles Michael Asher presented an “empty exhibition space” at Galleria Toselli in Milan, choosing to exhibit nothing. Through this gesture, he revealed that the space intended to contain art already functions as a framework that defines it. Although nothing hangs on the walls, the previously unseen office areas, the gallery’s operations, the curator, and even the visitors themselves become part of the exhibition.

나름의 여러 구체적인 방법론을 열거해보았다. 제법 합리적으로 읽혔는가? 아마 빈틈이 많을 것이다.  고착된 것에는 이유가 있고, 그것을 전복시키기란 쉽지 않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보이지 않는 권력들을 의식하고 의심하며 마주 볼 필요가 있다. 그것이 합리적인지 아닌지는 이후에 판단할 문제다. 한편으로는 나의 식견이 부족하여 모르고 있는 사실들이 있을 수도 있다. 이미 비슷한 생각을 하고, 전복시키려 했을 시도도 어딘가에 분명 있을 것이다. 조금이나마 진취적으로 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면 그것만으로도 족하다. 

나야말로 언제나 확고한 기준점은 화이트라 생각했다. 덧대고, 긁고, 다시 덧대고, 닦아내기. 내가 대학에 들어온 수년 동안 가장 많이 한 일이었으니까. 단 한치의 의심도 없이 깨끗하고 완결된 감각만을 쫓아왔다. 물론 그것이 틀렸다고 말하고 싶은 건 아니다. 다만 화이트(white)만이 옳은 기준이라고 말하기엔, 세상은 완결되지 않는 것들 투성이다. 오염되기도 하고, 다분히 다층적이다. 그리고 그것엔 저마다의 맥락이 있다. 예민한 눈과 넓은 마음으로 유심히 살펴보지 않으면, 놓치기 쉬운 것들이 너무나도 많다. 비로소 그것이 두 눈에 담길 때, 한번쯤 스스로에게 물어볼 수 있기를 바라며 글을 마친다.

내가 믿어온 기준은 어디서 왔는가?

나에게 화이트(white)는 여전히 기준인가? 

나에게 기준이 되는 것은 무엇인가?

소중한

towertvoll@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