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Voyage on the North Sea: Art in the Age of the Post-Medium Condition, by Rosalind Krauss.
Book cover image. Source: Shin, Dokho.
A publication outlining art in the era of the post-medium condition, which forms the central theme of this te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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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사회는 무엇보다 ‘쉽게 생겨나고, 쉽게 사라지는’ 속성으로 규정된다. 장르의 해체, 경계의 불분명성, 유연성과 효율성, 그리고 테크놀로지의 비약적 진화와 맞물려 나타나는 민첩하고 가변적인 흐름은 이 시대를 규정하는 핵심 미덕이자 키워드로 작용한다. 다시 말해, 기술 발전과 함께 이전에는 가시화되지 않았던 다양한 범주와 가치들이 문화 예술의 장으로 부상함에 따라, 복합적인 이해 관계와 감각 구조가 얽힌 상황이 펼쳐지고 있다. 이로 인해 전통적으로 고정된 원칙, 질서, 개념, 그리고 관념으로 작동하던 경계들이 무너지고, 서로 충돌하거나 교차하며 재해석 및 재맥락화되는 현상이 일반화되고 있다. 이러한 유동성과 복합성은 동시대 예술의 핵심 동력으로 작동한다.
이 같은 흐름은 예술에서 ‘매체’가 가지던 고유한 특정성에 대한 인식을 보다 변화시키고 있다. 매체 고유의 속성을 고수하기보다는 그것을 해체하고 재구성하려는 경향이 두드러지게 되는데, 이를 잘 설명해주는 개념적 이론이 로잘린드 크라우스(Rosalind Krauss)가 발화 한 ‘포스트 미디엄 조건(Post-Medium Condition)’일 것이다. 해당 개념은 크라우스가 모더니즘 미학의 근간이던 매체 고유성(media specificity)을 비판하면서 제시한 것으로, 더 이상 예 술이 특정 매체에 종속되지 않고, 매체를 넘는 개념적 전략에 따라 구성되는 상태를 지칭한다. 다시 말해, 작품의 본질은 더 이상 매체 자체에 있지 않으며, 매체의 고유한 물성이나 형식적 규범보다는 그로부터 파생되는 의미 작용과 사회적 기능, 관계적 맥락이 중심이 되는 조건으로 전환되었다는 것이다.
오늘날 예술은 단일한 질문 혹은 단일한 형식을 통해 해답을 제시하기보다, 오히려 다중의 층위에서 복합적인 질문을 제기하는 방식으로 존재한다. 이 같은 경향은 동시대의 대 표적인 예술가들에서도 확인된다. 이를테면, 스위스 출신의 현대미술가 토마스 허쉬혼 (Thomas Hirschhorn)은 설치, 조각, 퍼포먼스, 정치 담론, 커뮤니티 아트의 경계를 넘나들며 작업을 전개한다. 한편 대중문화의 영역에서는 카니예 웨스트(Kanye West)가 대표적인 사례 다. 그는 단순한 힙합 아티스트를 넘어, 음악은 물론 패션, 영상, 종교성, 건축적 공간까지를 포괄하는 확장된 예술 실천을 수행한다. 이처럼 오늘날 예술은 특정한 미디엄에 고정되지 않으며, 매체 간 경계를 넘는 전략이 창작의 주요한 지점으로 부상하고 있다.
크라우스가 제안한 ‘포스트 미디엄 조건(Rosalind Krauss)’은 이러한 시대적 흐름과 맞물려, 예술의 힘을 ‘무엇을 어떤 방식으로 다루는가’라는 문제로 이동시킨다. 특히 융합적 테크놀로지를 기반으로 한 미디어아트 영역에서는 해당 조건이 더욱 밀도 높게 구현된다. 크놀로지는 더 정교하게, 더 빠르게, 그리고 더 포괄적으로 진화하며 예술의 형식적·개념적 경계를 지속적으로 확장시킨다. 크라우스의 비평적 선언은 오늘날 더욱 현실화되고 있으며, 동시 대 미디어아트 실천 전반에 깊숙이 스며들고 있다. 이를 확인할 수 있는 대표적인 사례로는, 일본 기반의 아트 컬렉티브 팀랩(TeamLab)과 영국 런던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랜덤 인터내셔널(Random International)과 같은 그룹이 있다. 이들은 물리적 공간, 디지털 테크놀로지, 관 객의 참여를 유기적으로 결합함으로써, 매체의 물성을 넘어서 감각적·개념적 체험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예술적 가능성을 탐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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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 미디엄 조건(Post-Medium Condition)은 더 이상 특정한 재료나 기술이 예술의 본질을 규정하지 않는 형식적 자유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었음에 의의가 있다. 나아가, 현대 사회의 급변하는 흐름과 맞물려 디어아트의 융합을 촉진했다는 점도 고무적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동시대 예술과 미디어아트의 경향과 테크놀로지의 발전이 트렌드(trend)라는 이름의 빠른 흐름을 지향하는 현대 사회의 미덕과 맞물리면서, 속도와 기술적 자극의 과잉 속에서 개념과 서사의 부재를 드러내는 경우도 많아졌다.
나아가 기술 매체가 은유의 장르가 아닌 다시금 목적 그 자체로 기능하게 되는 사례도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를테면, 2018년에 열렸던 《빛의 벙커: 클림트》 전은 대형 몰입형 미디어 전시로 구스타프 클림트 등의 명화를 디지털 프로젝션으로 재해석한 프로젝트였다. 전시는 관람객의 직관적인 반응은 성공적으로 이끌어낼 수 있었지만, 작품의 맥락이나 근간이 되는 내용은 거의 전달되지 않았고, 되려 원작의 의미가 희석되면서 ‘클림트를 배경으로 한 셀카 명소’로 소비 되었다. 이는 다시 말해, 미디어 기술이 작품 해석이나 사유를 이끄는 도구가 아니라, 시각적 몰입을 위한 장치로만 기능하는, 미디어 자체가 목적이 되는 예시라고 볼 수 있다.
인간의 삶의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해주는 기술의 진취적인 동향은 미디어아트 내에서도 상당히 고무적이나, 빠른 변화 속도와 감각의 과잉으로 인한 휘발성은 잇따라 올 수 밖에 없는 것도 현실이다. 개념과 서사의 부재는 맹목적이고 무지향적인 소비를 야기한다. 이러한 과도한 휘발성은 우리가 살아가는 인간 사회에서 ‘오랜 시간을 들여가며’ 사유하며 살아가야 할 중요한 가치들을 놓치게 만든다. 이는 우리가 동시대의 ‘휘발성’에 대해서 위기 의식으로 재고(再考)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며, ‘지속가능성’에 대한 의식도 동시에 함양해야할 당위일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지점에서 근본적으로 자문해볼 수 있을 것이다. 다양한 감각들이 빠르고 과다하게 범람하고 상호작용하는 동시대에서 ‘미디어아트’는 무엇을 지속할 수 있는가? 미디어아트는 ‘어떤 가치‘를 휘발적이지 않고 ’지속 가능한 방식‘으로 ’전달‘할 수 있는가? 우리는 질문에 과연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이며 합리적인 답변을 제시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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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이러한 고민과 논제 속에서, 미디어를 단지 시청각적 장치가 아니라 타인의 고통과 기억을 잇는 언어로서 제시하고 있는, 한국의 미디어 아티스트이자 영화 감독인 임흥순(IM Heung -soon, 1969) 작가와 그의 작업에 주목하며 답변의 실마리를 찾고자 한다. 이토록 가변적이고 유동적인 속도 사회의 동향 속에서 동시대의 미디어아트는 무엇을 지속할 수 있으며, 범람하고 있는 감각 너머에 남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인지에 대한 답변으로서, 동시대 동향의 대척점에 서있는 그와 그의 작업이 어떤 존립 근거과 함의를 갖는지 상세하게 들여다 볼 것이다.

2 Lim Heung-soon, Portrait Profile. Source: Official website of Lim Heung-soon.
임흥순(1969년생)은 동시대에 활발히 활동 중인 중견 미디어 아티스트로, 여성 노동자, 이주자, 국가폭력 피해자 등 사회적으로 가시화되지 않은 인물들을 주인공으로 삼아 사회적 기억과 집단 감정의 층위를 시청각 언어로 풀어내는 작업을 지속해왔다. 그는 영화, 설치, 영상, 사진, 다큐멘터리 등 다양한 매체를 혼합하고 넘나들며, 전형적인 ‘포스트-미디엄 조건(Post-Medium Condition)’의 미디어 아트 실천을 이어간다. 그러나 임흥순은 매체를 효과 중심보다는 언어로 기능하게 하는 역할에 주목하는 작가라 볼 수 있다.
2015년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은사자상을 수상한 작품 《위로공단》, 후술할 《비념》과 《우리를 갈라놓는 것들》은 디지털 영상과 다큐멘터리 양식을 활용한 대표적인 예이다. 이 작품들은 기술적 구현 이상의 것으로, 타인의 서사와 집단의 기억, 윤리적 감각 등 인간적 요소를 중심에 둔다. 이처럼 임흥순의 작업은 ‘연대의 가치’와 이를 전달하려는 ‘윤리적 책임’에 기반하여 다양한 매체를 혼용하고, 그로써 공공의 기억과 성찰의 장을 마련한다.
앞서 논의한 ‘포스트-미디엄 조건(Post-Medium Condition)’이 지닌 ‘형식적 자유의 가능성’과 ‘기술적 자극의 휘발적 과잉’이라는 양면성은, 임흥순의 작업에서는 오히려 연대성과 윤리적 감각을 증진시키는 방식으로 보완되며, ‘의미 생산’의 구체적 방식으로 작동한다. 그러나 누군가는 역사 의식에 대한 재고를 통해 인간 사회의 지속 가능성을 추구하고자 할 경우, 반드시 그것이 미술을 통해서여야 하는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다. 단순한 역사 교육이나 선형적 수집 자료를 통한 서사 구성과 비교할 때, 미술은 무엇이 다른가?
역사박물관이나 기념관과 달리, 미술관이 제시하는 ‘형식적’ 차이는 일률적이고 통상적인 갈래의 시선에서 벗어나 ‘다중적인 관점’, ‘균열’, 그리고 ‘가능성’을 담아낸다는 데 있다. 이는 마치 트럼프 카드에서 조커(Joker)가 수행하는 역할처럼, 규범의 바깥에서 새로운 의미망을 작동시키는 위치에 놓인다. 이처럼 미술은 보이지 않는 면면에서의 ‘의미 생산’ 혹은 그것의 사회적 ‘재생산’을 통해, 공적인 서사의 단면을 넘어선 사고의 전환을 가능케 한다.
이러한 점에서 임흥순과 그의 작업은 동시대의 피상적이고 자극적인 시각 환경 속에서도, 인간 사회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감각을 넘어선 내·외적 영향력을 발휘한다. 이는 일시적 자극에 그치지 않고, 지속 가능한 감응의 장을 형성함으로써 강한 의의를 획득한다. 이러한 작용은 단순히 현실을 기록·전달하는 다큐멘터리의 기능을 넘어서, 미술이라는 매체가 지닌 미적·형식적 언어를 통해 감각과 사유의 층위를 다중적으로 확장시키는 예술적 실천으로서의 의미를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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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살펴본 맥락을 바탕으로, 임흥순 작가의 작업 전반에 걸친 총론적 면모를 개괄하였다. 이제 동시대 미디어아트 작가로서 그가 구체적으로 어떠한 작업과 매커니즘을 통해 담론을 제시하고 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특히 장편 영화 작업인 《비념》, 전시와 동명의 영상 매체 작업 《우리를 갈라놓는 것들》(2017년 국립현대미술관 전시 및 3채널 비디오, 2019년 극장 영화)을 중심으로, 그가 의도한 연출 방식과 내러티브의 구조를 보다 면밀히 분석하고자 한다.

3 〈비념〉 (Jeju Prayer, 2012), directed by Lim Heung-soon. HD video, 5.1 channel sound, 93 min, 2012.
Teaser poster. Source: Official website of Lim Heung-soon.
《비념》은 제주 4·3 사건과 강정마을 해군기지 건설 과정에서 드러난 제주 주민들의 아픔과 삶을 주제로 한 다큐멘터리 영화로, 지역 공동체의 정서적 기억을 시청각적으로 재현한 작업이다. 작가는 역사의 침묵을 복원하는 기술로서 다큐멘터리라는 디지털 매체를 선택하고, 감정적이며 윤리적인 몰입을 유도하는 시적 연출을 통해 서사적 연장성과 정서적 공명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특징적이다.
이 영화는 제주 4·3 사건으로 남편을 잃은 강상희 할머니의 삶을 중심 축으로 삼아, 대중에게는 관광지로 알려진 제주도의 또 다른 얼굴을 조명한다. 특히 영화가 개봉되던 당시, 제주 강정마을 해군기지 건설 과정에서 발생한 구럼비 바위의 여섯 차례에 걸친 폭파 강행 사태는, 제주에서의 비극이 단지 과거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현재진행형’임을 드러낸다.
제목이기도 한 ‘비념’은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일대에서 유래한 의례로, 연물을 사용하지 않고 요령만을 흔들며 신에게 기원하는 간소한 형태의 굿을 의미한다. 영화 속에서는 이러한 ‘비념’이 실제로 간결한 의식의 형태로 등장하지만, 그 기능은 단순한 의례에 머물지 않는다. 오히려 굿판에서 무속인이 과거의 이야기를 읊조리듯, 이 장면은 과거의 비극적 사건들을 현재로 불러들이며 시간의 층위를 교차시킨다. 즉, 영화는 ‘비념’이라는 의례를 통해 제주 4·3 사건과 강정 해군기지 건설 사태를 서사적으로 연결하고, 이를 통해 과거와 현재의 비극이 단절되지 않았음을 은유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4 〈비념〉 (Jeju Prayer, 2012), directed by Lim Heung-soon. HD video, 5.1 channel sound, 93 min, 2012. Image source: Jeonju International Film Festival Official YouTube Channel.
본 영화를 보다 면밀히 분석하기 위해, 관련 연구자들의 논의를 참고해 연출적 의도를 살펴보고자 한다. 김소연은 영화에서 구럼비 바위의 폭파가 과거의 비극적 사건인 제주 4·3사건의 희생자들을 애도하던 공간의 파괴로 연결된다는 점을 지적하며, “결국 제주 공동체가 4.3사건의 희생자들을 애도하던 공간으로서 기능하던 구럼비를 폭파시키게 된 상황으로 서사를 이어감으로써, <비념>은 4.3사건을 잊혀진 과거의 기억이 아니라 현재화된 사건으로서 재구성한다”고 말한다. 이는 단지 과거를 다룬 영화가 아니라, 현재의 정치적·사회적 맥락 안에서 그 기억이 다시 ‘작동’되도록 하는 연출 전략의 일환이라 볼 수 있다.
손은하 역시 이와 유사한 관점에서, 재현의 개념을 단순한 이미지의 복원이 아니라 기억과 사회적 관계의 ‘개입’ 행위로 본다. 연구자는 “어떤 사건이나 기억에 대한 재현을 한다는 것은 단순한 표현체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 사회에서 사회적 관계를 맺는 구성원 사이에서 ‘기억에 개입하는’ 결과물로 봐야 한다”고 설명하며, 나아가 “영화라는 것을 ‘과거를 현재화시키는 기능’을 지닌, 공식적으로 기록된 대표 역사에 눌려 언급되지 않았던 다양한 기억들을 소환시키는 역할을 하는, 첨단기술과 접목된 매체”라고 정의한다.
여기서 반복적으로 언급되는 ‘현재화된 사건으로서의 재구성’은 본 작업에 대한 핵심적 해석이자, 동시대 미디어아트 담론에서 중요한 개념적 좌표로 기능한다. 이는 단순한 역사적 사실의 소환이나 일회적 기억의 환기 차원을 넘어, 과거의 사건을 현재적 시간성과 접속시키는 서사적·매체적 실천을 의미한다. 즉, 기억의 재구성은 정동과 윤리, 서사와 미학이 중첩된 층위에서 작동하며, 그로 인해 일시적 감상의 휘발성을 초과하는 지속적 감응의 지형을 형성하게 된다. 바로 이러한 지속성 자체가 ‘지속가능한 감각’, 혹은 ‘지속가능성’으로 논의될 수 있다.
임흥순은 이와 같은 지속가능성의 미학을 디지털 매체이자 사회적 기억의 재매개 도구인 영화와 비디오 작업을 통해 실현한다. 그의 영상 작업은 망각된 과거의 비극을 현재의 삶과 연결짓는 시적 내러티브와 감각적 연출을 통해, 고발이나 사실 전달을 넘어 관객의 윤리적 감응과 내면적 성찰을 유도한다. 이때 영상은 그저 정보를 전달하는 다큐멘터리적 수단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감각적 층위에서 정동을 중개하고, 역사적 트라우마를 예술적으로 전유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나아가 이는 미디어아트가 동시대 사회에서 발휘할 수 있는 예술적 개입의 가능성이자, 기억의 정치학에 대한 미학적 응답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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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우리를 갈라놓는 것들》 Things That Do Us Part – Belief, Faith, Love, Betrayal, Hatred, Fear, Ghost, Museum of Modern Art, 2017. Image source: Official website of the National Museum of Modern and Contemporary Art.
이렇듯 임흥순은 과거의 역사적 사건을 회고하거나 재현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이를 동시대적 감각 속에서 ‘현재화’하며 지속적인 감응의 장을 구축해왔다. 나아가 그는 이러한 태도를 기반으로, 미디어아트의 영역에서 지속가능한 새로운 서사적 방법론을 제시하는 데까지 이른다. 그 구체적 사례가 바로 국립현대미술관의 현대차 시리즈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진행된 개인전이자, 동명의 영화 작업인 《우리를 갈라놓는 것들》(2019)이다.
이 전시에서 임흥순은 지난 2017년부터 천착해온 작업을 바탕으로, 네 명의 노년 여성들의 사적이고 실존적인 경험을 중심에 두며 다큐멘터리, 인터뷰, 아카이브, 퍼포먼스, 영상 설치 등의 매체를 복합적으로 활용하였다. 이들의 구술은 단순한 증언을 넘어, 한국 근현대사의 비극적 현실과 긴밀히 교차하며 역사적 산증인의 서사로 확장된다. 작가는 이를 통해 ‘분단’이라는 한국 사회의 구조적 문제를 중심에 놓고, 분단과 전쟁, 이주와 젠더, 계급, 국경 등 다양한 경계의 층위를 가시화한다.
특히 이 작업은 3채널 비디오 설치를 중심으로 하되, 다중적인 내레이션 구조, 아카이브적 재현, 퍼포먼스적 재연 등을 통합하여 복합적인 내러티브 환경을 구성한다. 이러한 형식적 실험은 단지 서사의 다양화를 넘어서, 미디어아트가 동시대의 기억과 감각을 다층적으로 구성해낼 수 있는 미학적 전략임을 드러낸다. 결과적으로 《우리를 갈라놓는 것들》은 단일한 역사나 기억의 재현을 넘어서, 주체 간 관계와 사회적 경계, 감각의 정치학에 대한 심화된 질문을 제기하는 작업으로 평가될 수 있다.
당시 국립현대미술관 현대차 시리즈 전시에 부대된 작가 인터뷰 영상에서 임흥순은 ‘조각난 이미지들의 구성‘에 대한 자신의 연출 의도에 대해 “완결된 작품을 관객들에게 보여주기보다는, 여러 개의 어떤 파편화된 이미지들, 그러니까 관객 참여, 무대 행사, 특별공연, 설치도 그렇고 영상도 그렇고 이러한 조각조각들을 하나로 묶는 건 관객들 몫인 것 같습니다.”라고 언급한 바 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임흥순의 ’포스트 미디엄 조건(Post-Medium Condition)‘에 기반한 작업 의도가 구체적으로 어떤 방식으로 구현되고 있는지를 보다 명료하게 확인할 수 있다. 본 전시에서 나타나는 복합적 형식성과 파편화된 서사 구조는 단일한 매체나 선형적 서사의 의존을 지양하며, 이질적인 이미지들과 상이한 매체들을 병치·조합함으로써 관객이 해석 주체로 개입할 수 있는 ‘열린 구조’를 형성한다.

6 《우리를 갈라놓는 것들》 Things That Do Us Part, 2017, 3-channel video (2K), 7.1-channel sound, 49 min, Image source: Vandal Official Website.
특히 전시의 핵심 축이라 할 수 있는 《우리를 갈라놓는 것들》은 3채널 영상 설치와 관련 오브제의 전시를 통해 다층적 감각 경험과 시간의 병렬적 구성을 시도한다. 이때 3채널 구조의 도입은 내러티브를 일률적인 시퀀스로 종속시키지 않고, 병렬적이고 비선형적인 방식으로 배열함으로써 관객이 능동적으로 의미의 맥락을 구성하고 사유하도록 유도하는 장치로 기능한다. 이러한 연출 전략은 작가가 탐구하는 핵심 담론, 즉 ‘분리’, ‘분열’, ‘분단’을 유발하는 사회적 기제들에 대한 비판적 추적과 성찰을 가능하게 하며, 결과적으로 미디어아트가 지닌 다층적 감각성, 서사적 유연성, 그리고 담론 생산의 잠재성을 극대화하는 실천으로 해석할 수 있다.

7 《우리를 갈라놓는 것들》 Things That Do Us Part, 2019, 1h 40 min, Source: Cine21 Official Website. (The same source applies to the still images below.)

8 《우리를 갈라놓는 것들》 Things That Do Us Part, 2019, 1h 40 min, Source: Cine21 Official Website. (The same source applies to the still images below.)
사진은 전시 외부에서 별도로 촬영된 것이 아니라, 영화 《우리를 갈라놓는 것들》 러닝타임 약 한 시간 이후에 등장하는 장면이자, 영화의 일부로 삽입된 스틸컷이다. 이 장면에서 감독 임흥순과 스태프들이 영화 촬영 도중 미술관을 방문해 《우리를 갈라놓는 것들》 전시를 관람하는 모습이 담긴다. 이는 전시와 분리되어 진행되던 영화적 내러티브가 다시 미술관이라는 장소로 회귀함으로써, 매체 간 이동과 자기 반영적 구성의 특성이 드러나는 지점이라 할 수 있다. 주목할 만한 점은, 이 방문이 그저 촬영팀의 동선 기록에 그치지 않고, 등장인물 중 한 명이자 전시의 실제 배경에 해당하는 인물인 고계연 할머니의 지인, 김군자 할머니가 전시를 관람하는 모습이 영화 속 장면으로 삽입된다는 사실이다. 영화 속에 이미 등장한 장면을 마주하는 김군자 할머니의 시선은, 관객으로 하여금 그동안 구성된 영화적 재현과 실재의 층위를 다시금 사유하게 만든다.


9 《우리를 갈라놓는 것들》 Things That Do Us Part, 2019, 1h 40 min, Source: Cine21 Official Website. (The same source applies to the still images below.)
10 《우리를 갈라놓는 것들》 Things That Do Us Part, 2019, 1h 40 min, Source: Cine21 Official Website. (The same source applies to the still images below.)
또 다른 장면에서도 유사한 구조가 드러난다. 극 중 인물의 서사는 재연 배우들—강나라, 박세현, 윤수련—의 연기를 통해 전개되다가, 어느 순간 카메라는 배우들이 자신이 연기한 인물에 대해 직접적으로 이야기하는 장면으로 전환된다. 재연이라는 영화적 장치를 통해 일정한 거리감을 유지하던 관객은, 갑작스레 부각되는 인물들의 실존성과 직접적인 발화 앞에서 일정한 당혹을 경험하게 된다. 이처럼 실제 인물과 재연 배우 간의 경계가 교차하는 구성은 단순한 메타적 장치 이상의 효과를 낳는다. 관객은 더 이상 이 장면이 다큐멘터리인지 극영화인지 명료하게 분리할 수 없게 되며, 바로 이 지점에서 재연과 실재의 경계가 교란되고 해체된다.

11《우리를 갈라놓는 것들》 Things That Do Us Part, 2019, 1h 40 min, Source: Cine21 Official Website. (The same source applies to the still images below.)

12 《우리를 갈라놓는 것들》 Things That Do Us Part, 2019, 1h 40 min, Source: Cine21 Official Website. (The same source applies to the still images below.)
이러한 구조적 전환은 영화의 결말부에서 정점에 도달한다. 배우 박세현, 강나라, 윤수련이 개기일식이 끝나고 하늘이 다시 밝아지는 순간을 바라보는 장면 이후, 각각이 연기한 실제 인물들—정정화, 김동일, 고계연 할머니—의 얼굴로 이어지는 삼중 시퀀스가 삽입된다. 개기일식이라는 상징적 순간이 어둠에서 빛으로 전이되는 장면과 겹쳐지며, 재연 배우와 실존 인물이 서서히 겹쳐지고, 감각적으로 이어진다. 필자는 이 장면이 영화가 내포한 ‘분열’과 ‘분단’의 감각적, 감정적 외상을 논리적 개념이 아닌 상징과 직관, 이미지의 겹침을 통해 표현하는 방식이라 해석한다. 동시에 이 연출은 재연과 실재, 허구와 기록의 이분법적 구도를 해체하며, 관람객으로 하여금 그 경계를 자각하면서도 결국에는 그것을 초월하도록 이끈다.
우리가 앞서 바라본 ‘전환된 방향성’은 단순히 역사적 진술로서의 영화가 현재화된다는 개념적 구조에 머무르지 않는다. 다소 당황스럽고 혼란스러울 수 있는 장면들과 연출은, 영화 《우리를 갈라놓는 것들》이 재연과 실재, 허구와 기록, 전시와 영화라는 이질적 형식들을 오가며 구축한 경계 없는 구조의 일환이다. 특히 이는, 제주 4.3 사건과 지리산 빨치산, 그리고 그 이면에서 살아온 가족들의 삶이라는 실존적 배경 위에 놓이며, 영화적 재연이라는 장치가 일반적인 픽션이 아닌 ‘기억을 현재화하는 감각적 구조’로 기능하게 한다. 다시 말해, 이 영화는 과거를 재현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것을 현재로 이동시키며, 관객으로 하여금 역사를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경험’하게 만든다.



13 《우리를 갈라놓는 것들》 Things That Do Us Part, 2019, 1h 40 min, Source: Cine21 Official Website. (The same source applies to the still images below.)
이러한 연결 지점은 곧 ‘이면의 목소리’로 제시되며, 매체적 기술과 감각을 통해 관람자에게 사유되고 매개되기를 바라는, 임흥순의 ‘공동체적 호소’로서의 지속 가능성을 구현한다. 결국 《우리를 갈라놓는 것들》은 재연과 실재를 넘나들며, 기억되지 못한 자들의 목소리를 감각적으로 소환하고 공동체적으로 감응하게 하는 하나의 통일된 목적을 향해 나아간다. 이는 단순한 매체 실험을 넘어, 임흥순 작업 전반을 관통하는 윤리적이고 정치적인 지향점이자, 그의 작업이 갖는 존립 근간을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이러한 해석은 김동일 연구자의 논의에서 더욱 분명해진다. 그는 “임흥순의 미학적 실천이 자신의 카메라가 채집했던 말과 풍경의 궤적을 관객에게 전달하기 위한 모든 방법을 동원하고 있다”고 밝히며, 나아가 “우리의 역사와 세계 도처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 사회적 비극을 이해한다는 것은 이성과 비판뿐 아니라 감각과 직관 역시 필요로 한다”고 언급한다. 여기서 말하는 ‘감각’과 ‘직관’은 일반적인 감성 요소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임흥순이 영화 혹은 다큐멘터리라는 매체를 객관적 사실의 재현 수단에 국한하지 않고, 미학적 실천의 장으로 확장함으로써 가능해진 감각적 사유의 층위를 가리킨다.
즉, 그의 작업은 반복되는 역사적 폭력과 비극을 서사적 복원 너머로 위치시키며, 그것을 감각적으로 현재화함으로써 관객으로 하여금 기억하는 것을 넘어, 경험하게 만든다. 이러한 접근은 미디어아트로서의 영화가 가지는 윤리적 감수성과 공동체적 호소력, 그리고 그 지속 가능성에 대한 중요한 실천적 사례로 읽힐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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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미디어아트의 발전 및 그 휘발적 양면성에 대한 논거는, 기술 발전에 기인한 속도성과 자극의 과잉이 지배하는 동시대 시각 환경, 그리고 로잘린드 크라우스(Rosalind Krauss)가 제시한 ‘포스트 미디엄 조건(Post-Medium Condition)’이라는 이론적 틀을 통해 제시한 바 있다. 이는 매체의 특정성이 해체되고 다양한 기술적 매체가 예술의 장으로 유입되는 현상 속에서, 미디어아트가 어떤 미적·윤리적 가능성을 내포하는지에 대한 물음을 가능하게 한다. 필자는 이 지점에서 “미디어아트는 무엇을 지속할 수 있는가”, 나아가 “어떤 가치를 휘발되지 않고 지속 가능한 방식으로 전달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중심에 두고, 이에 대한 사유의 실천적 사례로서 임흥순과 그의 작업을 고찰하게 되었다.
임흥순은 포스트 미디엄 조건(Post-Medium Condition) 하에서 매체의 유연성을 수용하면서도, 기술을 감각의 소비 혹은 시각적 자극의 도구로 환원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기술을 ‘인간을 향한 윤리적 언어’로 전환함으로써, 미디어아트의 윤리적 지평을 확장하고 있다. 그의 영상 작업은 동시대의 테크놀로지 기반의 자극적이고 탈맥락화된 이미지 환경과는 분명한 대척점에 서 있으며, 그 속에서 ‘연대’, ‘기억’, ‘공감’, ‘책임’과 같은 인간 사회의 근원적 가치를 담아낸다. 이는 서사의 전달이나 감각적 재현을 넘어서, 매체를 통해 지속 가능한 감응의 층위를 구성해내는 미학적 실천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임흥순의 작업은 기술을 현전하는 감각적 이미지로 환원시키지 않고, 연대적 의식과 윤리적 책임으로부터 출발한 감각적 구성물로 재구성한다. 나아가 그의 영상 안에서 감각은 곧 사회적 기억을 매개하는 방식으로 작동하며, 그 속에서 관객은 감상의 주체를 넘어 ‘윤리적 개입자’가 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미디어아트는 단순한 형식적 실험의 장이 아니라, 동시대의 미적·사회적 과제를 사유하고 실천하는 동력으로 기능하게 된다.
오늘날 휘발적인 감각이 지배하고 분주히 유동하는 사회 속에서도, 기술은 단지 감각적 이미지로서만 환원되지 않는다. 연대적 의식과 윤리적 책임에 기반하여 현재화된 시선으로 세계와 조응하는 태도야말로 미디어아트가 추구해야 할 핵심적 지점 중 하나라 할 수 있다. 이러한 태도를 통해 매체는 단순한 정보 전달의 통로를 넘어서, ‘공감과 기억의 연쇄’를 호출하는 매개로 기능하게 되며, 이는 미디어아트가 다양한 형식과 감각의 언어를 통해 지속 가능한 예술 실천의 전략으로 위치할 수 있는 기반이 된다.

14 《우리를 갈라놓는 것들》 Things That Do Us Part, 2019, 1h 40 min, Source: Cine21 Official Website. (The same source applies to the still images below.)
따라서 우리는 더 이상 “휘발되는 감각의 시대에 미디어아트는 지속 가능한가?”, “무엇을 지속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머무르기보다는, 보다 능동적이고 미래 지향적인 관점에서 “미디어아트는 무엇을 잇고, 어떻게 지속해야 하는가?”를 사유해야만 한다. 기술은 사회 안에서 발생하는 갈등과 불균형에 감응하고, 이를 예술적 감수성으로 조명하며 공동체적 상상력과 윤리적 책임을 매개하는 매체로 작동할 때 비로소 지속 가능성을 품게 된다. 그 과정에서 미디어아트는 현대 사회를 비판적으로 성찰하고 재구성하는 감각적 장치로서의 위치를 확보할 수 있다. 이와 같은 태도야말로 미디어아트가 감각의 소비를 넘어, 지속 가능해질 수 있는 실질적 방법론이자 가능성의 실현 경로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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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중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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