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로 전시는 산책이 되고, 미술관은 공원이 된다.
작품 앞을 거니는 순간만큼은 작가가 미술사에서 어떤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지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어떤 작품은 그저 산책하는 이의 눈에 들어온 정경처럼 그 자리에서 우리를 반긴다. 덕분에 우리는 창문 하나 열리지 않은 한겨울의 미술관에서도 화폭 속에 담긴 남프랑스의 해변, 혹은 타히티의 어느 외딴 섬으로 떠날 수 있다. 그 여행이 얼마나 기억에 남았는지가 전시의 인상을 가른다.
이 메커니즘은 결국 감상자의 받아들임에 따라 달려 있다. 제아무리 명작이라 해도 너무 많은 양을 한꺼번에 접하면 제대로 소화하지 못한다. 낙서 한 점이라도 무언가 생각하게 만든다면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좋은 전시에는 여백이 필요하다. 창의는 몽상에서부터 시작되고, 몽상은 홀로 헤맬 때 슬그머니 우리 곁에 찾아오기 때문이다. 필자는 이 은밀한 여운의 순간을 위해 미술관에 간다.
물론 이 순간이 매번 찾아오는 것은 아니다. 얼마 전 좋아하는 작가의 원화가 들어왔다는 소식에 국립중앙박물관으로 달려갔다. 전시는 평일 낮임에도 사람이 참 많았다. 온라인으로 시간 예약을 미리 해 두었음에도 입장하는 줄을 서야 했다. 입구부터 늘어선 관람객들이 컨베이어 벨트처럼 꼬리를 물고 이동했다. 작품이 눈에 들어올 리 없었다. 멈추어 앞의 그림을 잠시 들여다보자니 누군가가 기다리는 것이 부담스러워졌고, 평소 걸음걸이에 맞춰 발길을 재촉하자니 앞사람의 등이 코앞에 있었다. 결국 줄에서 물러나 한적한 복도로 피신했다. 인파 사이로 잠깐씩 보이는 그림은 아름다웠으나 어쩐지 아쉬운 마음이 드는 것을 감출 길이 없었다.
행렬에 섞여 들기를 포기하고 멀리서 전시장을 둘러보니 가위 진풍경이었다. 유독 사람이 몰린 한 코너에는 책 표지에 사용되어 눈에 익은 그림이 작은 액자 속에 들어 있었다. 액자 주위를 둘러싼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저마다 카메라를 꺼내 드는 것이 퍽 귀엽기도 했다. 셔터 소리가 요란하긴 했지만, 카메라를 치워야 한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유명인을 만났는데 누군들 신나지 않으랴. 여유만 있다면 나도 남겼을 것이다.
그러나 산책자의 시점에서, 인파에 치여 생각할 정신이 없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산책을 강남역이나 명동 한복판에서 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 않겠는가. 더구나 모든 이들의 관심이 대대적으로 홍보된 대표작에 쏠린 탓에 작은 소품은 위치를 찾기도 힘들었다. 메인 작품을 보기 위해 줄 선 사람들은 마치 놀이기구 입장 대기줄을 서는 것처럼 핸드폰을 보다가, 차례가 되면 사진을 찍고 또 다음 줄을 선다. 작품의 반 이상이 벽지처럼 여겨지는 모양새였다. 이쯤 되니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이 없었다면 달랐을까? 조명이 조금 더 밝았다면 어땠을까. 한국 미술관의 문제인가?

몇 달 후 어느 좋은 날, 루브르 박물관의 모나리자를 앞에 두고 똑같은 생각을 하게 됐다. 확실히 무슨 미술관, 어떤 나라만의 문제는 아니었던 것 같다. 세계 각국에서 몰려온 관람객들이 핸드폰을 뻗는 진풍경은 유명 가수 콘서트의 스탠딩석 열기와 비례했다. 물론 이 묘령의 여인이 세계 어느 슈퍼스타보다 유명한 몸인 건 자명한 사실이다. 인파가 뒤에서 밀치고 앞에서 버티는 통에 정작 모나리자의 얼굴보다 사람들을 통제하는 시큐리티의 얼굴을 더 자세히 보았다. 이게 미술관인가? 혹은 블랙 프라이데이 마감 직전의 가판대인가? 정신이 아득해졌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건 필자의 오랜 꿈을 이루는 순간이기도 했다. 미술학도가 되었으면 루브르 한 번 돌아봐야 한다는 버킷리스트를 시행하고자, 방학이 되자마자 호기롭게 비행기표와 뮤지엄패스를 끊었다. 일주일을 꼬박 미술관 관람으로 채운 일정은 완벽했다. 완벽하지 않은 건 상상을 초월하는 미술관의 규모와 빈약한 다리 근육이었다.
세계 최대 규모의 박물관이라는 칭호에 걸맞게 루브르 박물관은 60만 점 이상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으며, 그중 관람객이 볼 수 있도록 공개된 것만 3만 5천여 점에 달한다. 루브르를 제대로 돌아보려면 한 달이 넘게 걸린다는 괴담이 있다. 필자는 이 말이 농담인 줄 알았다. 그러나 실제로는 더하다.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1분에 한 점을 보아도 정확히 588.3시간이 걸린다고 한다.
588.3시간. 24.51일.
비극적이게도 배낭여행객에게 주어진 건 하루였다. 결전의 날, 개관 시간에 맞춰 줄을 섰다. 제일 먼저 모나리자와 밀로의 비너스를 봤다. 들라크루아, 고야, 루벤스. 카라바조, 렘브란트, 그리고 다시 루벤스. 라파엘로, 미켈란젤로, 그리고 다시 루벤스. 그림을 한꺼번에 너무 많이 보다 보면 스쳐 지나가는 와중에도 누가 그린 그림인지 알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 오전 내내 돌아다니며 생각한 건 오늘 더 편한 운동화를 신었어야 한다는 것과 루벤스가 그림을 참 많이 그렸다는 거였다.
점심시간이 되자, 마침 배도 고프겠다. 크루아상과 커피를 사서 잠시 카페에 주저앉았다. 이제야 사람이 아닌 미술관이 눈에 들어왔다. 머리가 새하얗게 센 노부부에서부터 중학생, 아이를 동반한 가족까지 웃고 떠드는 것이 아까 본 전쟁 같은 풍경과는 딴판이었다. 잠시 다른 장소에 왔는지 착각할 정도로. 게다가 전부 소풍이라도 온 듯이 여유로웠다. 작품 사진 하나를 두고 삼십 분째 대화를 나누는 이들도, 전시관 가장자리에 있는 의자에 앉아 벽만 한 그림을 뚫어져라 보는 이들도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 퀘스트를 깨듯 그림을 찾아다니던 나 자신이 절로 옹색해졌다. 그리고 궁금해졌다. 저들의 여유로움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 한국인과 달리 14시간 비행을 하지 않고도 올 수 있기 때문인가? 혹은 NON-EU 시민의 더럽게 비싼 입장료보다 저렴하기 때문인가? 물론, 농담이다.
우리를 미술관에서 산책하지 못하게 만드는 조바심은, 선사시대의 물물교환 정신에서 비롯되었다. 돈을 냈으니 마땅히 그 값어치를 해야 할 것만 같은 압박감에 휩싸인다. 필자로 예를 들자면, 루브르 박물관의 NON-EU 입장료 32유로를 모나리자와 밀로의 비너스, 그리고 그 밖의 3만 5천여 점의 작품을 볼 수 있는 기회로 등가교환 하여 생각하였다. 이를테면 옷 가게에서 32유로짜리 바지를 사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루브르 입장권은 빨아서 다시 입는 바지가 아니다. 미술관에 가는 것은 상품이 아닌 경험을 구매하는 것이다. 상품과 다르게 경험은 질적으로나 양적으로나 그 가치를 매길 수 없다. 그러나 그 대가를 재고 따지기 시작하는 순간 경험은 쌓이지 않는다. 오직 그 순간을 충실히 즐길 때만 모습을 드러낸다.
필자가 이런 결론을 내린 건 슬슬 해가 저물어 갈 무렵이었다. 구매한 오디오 가이드를 귀에서 빼버렸다. 인파가 한 곳에 몰리니 비교적 덜 유명한 작품이 전시된 관은 휑할 정도로 사람이 없었다. 네덜란드 화파의 정물이 있는 전시실에 앉아 그림과 눈싸움을 해 보았다. 그제야 캡션과 이름이 아닌 거센 붓질과 생동하는 식물이 보였다. 작품 번호를 잊고 발 닿는 대로 헤매어 보았다. 이번에는 그리스의 석상과 고대 이집트의 작은 토기 조각이 눈에 들어왔다.
비로소 파리의 한 공원에서 전시가 아닌 산책을 즐길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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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