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질은 틀이 아니다

1 My father’s middle school graduation album, mid-1980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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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 전 전시 근무 당시, 전시 내부의 공간 디자인을 담당했던 디자이너가 있었다. 실제로 뵌 적은 없었지만, 근무를 진행하면서 상주하는 동안 기획팀으로부터 그에 대한 여러 이야기를 들었었다. 들었던 이야기 중 가장 의외였던 점은 그는 대학을 졸업하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버젓이 저명한 디자이너였다. 

나의 편견이나 짧은 식견일지도 모르겠으나, 어쨌든 요즘 시대에 대학을 재학한다는 것이 먹고살기 어려웠던 이전의 시대만큼이나 특별한 경험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특히나 미술·디자인 계열의 인재를 양성함에 있어서 대학은 거의 필수적인 절차라고 생각했다. 그저 기법의 숙련과 이론 교육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넘어서, 관련된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같이 고민해나가는 후배와 동기들, 한 발짝 앞서 나가있는 선배들, 이미 전문적인 범주에서 활동하고 지도해 주는 교수님들과 함께하면서 겪고 배우는 경험들은 대학이라는 카테고리가 형성되어 있지 않고서 행하려 하기엔 결코 쉽지 만은 않은 길이기 때문이다. 

그 디자이너는 일찍이 대학을 중퇴하고 관심 분야에 끊임없이 리서치하고 연구하는 것에 집중했다. 기획 팀장님도 그의 리서치 수준에 감탄을 자아내면서, 덧붙여 그렇게 말씀하셨었다. 

「대학 본래의 기능은 여전히 존재하지만, 요즘은 대학이 가르쳐 줄 수 있는 것이 없어요. 결국 본질은 스스로에게 있는 것 같습니다.」 

지도적인 인재들을 양성하고 국가 및 인류 사회의 발전에 공헌하는 것에 있어 대학은 분명 중요한 조직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보다 더 본질적인 것은 대학을 이루는 교수와 학생 스스로의 학구열이다. 

나 스스로도 대학을 다니면서 가장 많이 느끼는 것은 되려 대학보다 중요한 것들이 무엇인지다. 똑같은 학교의 똑같은 학부생이어도 누군가는 자신의 학업 혹은 성취에 관심이 없고, 다른 누군가는 외적인 리서치까지 병행한다. 

꼭 성의가 있고 진중하게 고민하고 대해야만 좋은 결과물이 나오는 것은 아니지만, 결과물을 떠나 적어도 나는 그 마음가짐과 열정과 진심이 스스로를 성장하게 할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다. 되려 울타리 안에서 자신과 타인을 제대로 구별짓지 못한 채 안주하고, 스스로 도태되는 것을 합리화하기 바쁜 사람들은 분명 근사한 환경과 간판이 주어져도 더 나은 사람으로 성장할 수 없다. 본질은 틀이 아닌 그 마음에 있다. 근무하는 동안 지켜본 수많은 관람객들이 감탄을 자아냈던 공간을 디자인했던 그 디자이너가 그랬듯이. 그렇게 일련의 질문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기 시작했다.

​「지금 나는 이곳에서 무엇을 배우고 경험할 수 있을까?​」 

​​「나는 등 떠밀려 행하는 것이 아닌 본질적인 마음가짐을 갖고 행하는 것일까?」

​「그것이 정말 진실되다고 솔직하게 말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내가 정녕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몇 년 뒤엔 지금의 나보다 훨씬 더 그것에 가까이 맞닿아 있을까?」

​「그만큼 성장해있을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을까?​」​

쏟아지는 물음들에 담담히 말을 건넬 수 있을 때, 비로소 나는 답을 찾은 것일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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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살이라도 젊을 적 해외여행을 다녀오기를 권유하는 콘텐츠의 댓글에 갑론을박이 열렸다. 

내용은 이러했다. 조금은 극단적인 설정의 밸런스 게임일지도 모르지만, ‘빚을 내서라도 젊을 적에 여러 경험을 해야된다’와 ‘이미 이미지와 텍스트로 접할 수 있는데 굳이 무리해가면서 경험을 해야하냐, 자기계발이 먼저다’의 대립이었다. 

본 댓글에 열린 투기장 아닌 투기장을 오랫동안 읽어본 탓인지, 관련된 콘텐츠가 알고리즘으로 빈번히 보여졌다. 한편으로는 어느 의사가 인터뷰로 비슷한 주제에 대한 답변을, ’대학교 1학년 시절, 단돈 200만원과 배낭 하나로 유럽을 50일 동안 거의 거지꼴로 여행해본 경험이 있었고, 나는 이게 지금 이 순간도 너무 큰 경험이었다. 그때만 할 수 있는 건 분명히 있는 것 같다‘고 답했다. 물론 뭐든 극단적인 건 좋지 않다고 웃으며 후술하셨다. 

일련의 콘텐츠들을 계속 읽으면서, 여행도 마찬가지겠지만, 어쩌면 학교도 비슷한 범주에서 논의될 수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체능은 특히나 정말 어릴때부터 사교육을 받아가며 관련 종목으로 특화된 중 고등학교를 들어가는게 보편적인 코스이지 않나. 입시와 대학 생활도 크게 다르진 않을것이다. 그렇다면 그 모든 것이 ’하기 나름‘이라면, 간접 경험이 아니라, 직접 경험이 갖는 의의는 무엇이라 정의할 수 있을까?

그러나 확실한 것은 지금의 기술로 지구 반대편의 사람도 실시간으로 주고 받은 지도 오래된 세상에 못 볼 것이 무엇이 있겠느냐만은, 결코 기록과 텍스트와 이미지로 전부 설명될 수 없는 무언가가 있다. 

반문해보겠다. 내가 매체 너머로 보고 있는 것이 정말 진짜일까? 과거에서부터 이어져 왔던 원본과 복제 담론, 현재와 같은 AI 생성형 이미지가 난무하는 세상에서 우리는 ‘직접 경험’이 없다면 무엇 하나 진정한 의미로 ‘진짜’라 부를 수 있을까?

2 Messi and Pelé, former Brazilian legend and Argentine forward share a moment of mutual recognition, symbolizing a generational dialogue at the pinnacle of football. Courtesy of FC Barcelona Official Website

여기 한 가지 예시가 있다. 축구라는 종목에서 Greatest of all time을 선정할 때, 보편적인 여론으로 가장 대표로 거론되는 선수는 브라질의 펠레(Pelé)와 아르헨티나의 리오넬 메시(messi)다. 2022년, 리오넬 메시가 생애 첫 월드컵을 들어올렸을 때를 기점으로, 역사상 가장 위대한 축구선수로 메시를 꼽는 여론이 압도적으로 많아졌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지점은, 펠레가 월드컵을 3번 들어올렸을 시절이 1958년, 1962년, 1970년이다. 더군다나 그가 그라운드를 누비는 경기 전체의 영상기록물도 많지 않아, 비공식 기록들이 주를 이루고 있다. 

그렇다면 메시가 가장 위대한 선수로 거론되는 것은, 2022년 시점에서 펠레의 경기를 직접 혹은 최소 실시간으로 목격한 사람들의 증언이 충분히 반영되었냐고 물었을 때, 그것은 아닐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각 시대를 풍미했던 축구의 전술, 시대적인 환경과 과학 기술의 발전이 다르기에 동일선상에서 비교할 수 없지만, 만일 펠레의 시대를 직접 목격한 사람이 메시가 아닌 펠레가 가장 위대한 선수라고 언급한다면, 그들의 의견을 결코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이다.  

철저히 귀납론을 옹호하는 이야기로 들릴 수도 있지만, 요지는 직접 경험해보지 않으면 모르는 구석이 반드시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것이 논리 정연할 지라도 추론만으로는 와닿지 못할 이면이 존재하며, 이를 조금이나마라도 더욱 온전히 인식하기 위해서는 발을 담가보는 것이 필요하다는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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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질은 틀이 아니다. 다만, 틀은 무시할 수 없다. 특히나 예체능 계열을 전공해보거나 관련 종사자로 근무하고 있는 이들이라면, 자신의 출신 학교는 지독하게도 따라 붙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단지 그 사람을 평가하는 요소로서가 아니라, 앞서 말했듯 나를 이루는 주변의 환경에 크게 영향을 준다는 것이다. 인맥, 교육 인프라, 기회 그 모든 것이 독립적인 것이 아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미비하게나마 소위 ‘라인’이라고 하는 것에 속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주는 효용가치는 분명 여전히 거대함에 틀림없다. 

3 Tadao Ando, a self-taught architect who became a world-renowned figure without formal architectural education. Quentin Tarantino, who did not graduate from film school. Courtesy of eyesmag.

앞서 이야기한 맥락과 결부지어 볼 때, 그러한 직접적 경험이 주는 교육과 관계 형성은, 텍스트와 이미지로만 경험하는 세상과는 많이 다를 것이다. 절대로 ‘학교를 들어가지 않으면 안된다’ 라는 건 아니지만, 가지 못하거나 않아야만 하는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라면, 그 경험을 누리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일이라 느낀다.

흔히 많은 분야에서 정파(正派)와 사파(邪派)가 나뉜다. 근간적으로는 본래 무협 소설이나 동양 서사에서 자주 등장하는 개념인데, 쉽게 말해 정통적인 길을 걷는 무리와 정통에서 벗어난 길을 걷는 무리, 혹은 정의와 질서 중시의 주류와 자유롭지만 위험한 비주류적인 흐름으로 구분지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를 현대 한국 사회, 좁게는 학교의 유무에 적용해보면, 대학 입시 제도를 비롯한 사회적 시선은 여전히 좋은 학교를 가는 것(正派)에 높은 비중을 두고 있다. 물론 요즘은 정석적인 코스를 밟았다하더라도, 그 외적으로 자신의 재능을 살려 사회에 환원하는 사람들도 정말 많아진 것도 사실이다. 다만 문화예술계에 한정지어 고려해보았을 때, 학교를 가지 않고 작업 활동을 하는 작가나 디자이너(邪派)의 비중을 고려해보면, 특히나 젊은 예술가일수록 쉽게 찾아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어릴적부터 정파(正派)로서 학습되어왔을지도 모른다. 어릴때부터 준비를 해야한다, 예중 예고를 가야한다, 좋은 대학에 가야한다, 대학원에 가야한다. 다만 그것이 모든 것을 보장해주진 않는다. 

그 과정 속에서 얼마나 솔직하게 대하고 있는지, 둘러싼 환경이 나에게 어떤 영향을 주고 있는지 짚고 또 짚고 넘어가야 한다, 정파(正派)와 사파(邪派)는 그 다음의 문제다.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다. 내가 의도적으로 행했다고 생각해왔던 것들조차 어쩌면 누군가의 교육, 누군가로부터 영향을 받아 형성된 과정이자 결과일 것이다. 본질은 태도에 있으며, 태도는 정직한 판단 기조로부터 기인된다. 귀기울여보고, 부딪히고, 실패하고, 알아가기를 반복하는 정직함에서 기준이 바로 서는 것이다. 조금은 특출난 누군가의 이야기라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안도 다다오도 그랬고, 쿠엔틴 타란티노도 그랬다. 

물론 모든 것이 내 의도대로 되기란 불가능하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옳은 판단이라고 믿어왔던게 사실은 틀렸던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지금 어느 위치에 있으며, 솔직하게 대하고 있는가?​」 에 대해 진심 어린 답변을 건낼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에게 ​틀은 더 이상 중요한 문제가 아니게 될지도 모른다. 중요한 것은 어떤 틀에 속해 있는지가 아니라, 그 안에서 얼마나 직접 부딪히고 있는가인 것이다. 특히나 AI가 많은 것을 대체하고, 퍼스널 미디어와 임의적인 콘텐츠가 많은 지금일수록 더욱 유효한 이야기일 것이다. 동향을 읽는 것만큼이나 일률적인 파도에 대응하는 방법도 터득해야만 한다. 그러기 위해선 직접 움직이고 들어가보고 경험해보는 수밖에 없다. 그러니 또, 각오를 다질 수 밖에. 

4 Richard Serra, Torqued Ellipse IV, 1998. Courtesy of The Museum of Modern Art (MoMA). You cannot know it without experiencing it firsthand. It only reveals itself once you step inside. To stand outside and try to understand is meaningless. You must enter and experience it. Only then does it begin to unfold—whether as a work, or as a struc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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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 can only be understood backwards; but it must be lived forwards.

인생은 뒤돌아보아야만 이해되지만, 살아가는 것은 앞으로 나아가며 해야 한다.

-Søren Kierkegaard-

키르케고르

소중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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