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점수는요

-한국 미술교육의 현주소에 대한 짧은 고찰-

“제 점수는요”

쓰고 있던 선글라스를 살짝 내린 심사위원이 안경테 너머로 참가자를 응시한다. 참가자의 긴장한 표정과 침을 꿀꺽 삼키는 효과음이 여러 번 반복해서 나오고, 기대감을 높이는 웅장한 음악이 점점 빨라진다. 비장한 표정으로 심사 위원이 입을 여는 순간, ‘삐’ 소리와 함께 모자이크된 예고가 이어진다. 눈물을 흘리는 참가자, 심각한 얼굴로 지켜보는 두 번째 심사위원. 자극적인 장면들이 교차하고, 하단에는 작은 글씨로 다음 주 이 시간에…

바야흐로 2009년, 뭇 시청자들의 마음을 설레게 했던 프로그램이 있었다. 요즈음 앞다투어 방영하는 아이돌 서바이벌의 원조격이라고 할 수 있는 M사의 대국민 공개 오디션이었다. 노래를 잘 부르든 못 부르든, 옷이나 말투가 멋지든 특이하든, 방송 경험이 거의 없는 일반인들이 나와 다짜고짜 노래를 부르는 광경은 생경한 장면이었다. 그러나 그 생경함이 신선함으로 다가왔던 건지, 프로그램은 곧 최고 시청률을 기록하며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방송을 보며 심사위원과 같이 참가자들에게 점수를 매겨 보는 것은 물론이요. 1위와 2위를 가르는 문자 투표에 환호했다. 각종 장기자랑에서도 결과를 발표할 때 “제 점수는요.”라는 말투로 패러디하는 게 일상이었더랬다. 

그로부터 이십 년이 좀 안 되게 지난 오늘날, 강산은 두 번 바뀌었어도 대중의 심리는 크게 달라진 게 없다. 대치동 1타 강사의 강의, 수능 만점자가 읽은 책, 세계 챔피언이 신는 운동화, 100만 장 판매 기록, 우리의 일상을 수식하는 숫자들이다. 해외 여행지에서도 구글맵 평점 1, 2위를 다투는 곳들에는 한국어 리뷰가 도배되어 있고, 배달앱 리뷰 순위는 상권의 성패를 좌지우지한다. 

순위와 점수를 신뢰한다는 것은 세상을 객관적으로 나눌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이를테면 열 개의 문제 중 여덟 개를 맞힌 학생이 두 개를 맞힌 학생보다 더 뛰어나다고 보고, 70퍼센트 이상의 적중률로 스트라이크 존에 공을 던진 투수가 좋은 제구력을 가졌다고 보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이런 통계주의적 사고가 만연한 사회의 일원일수록, 객관적으로 분류할 수 없는 영역에 당황스러움을 느낀다. 세상에는 분명 딱 잘라 나누기 어려운 것들이 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예로 예술이 그렇다. 음악에는 음정이나 박자와 같은 규칙들이 존재한다. 그러나 곡을 완벽히 숙지한 피아니스트 둘 중, 한 명은 차가운 밤의 공기가 내려앉는 듯이 담담하고 섬세하게, 한 명은 눈보라의 폭풍이 몰려오는 듯 거세고 힘차게 해석한다면 둘 중 누가 낫다고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없다. 하물며 미술은 더 주관적인 영역이다. 정해진 규칙도 없을 뿐이거니와, 각기 다른 화풍과 개성이 뚜렷하여 우열을 가릴 수 없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와 앤디 워홀의 ⟨캠벨 수프⟩ 중 무엇이 더 훌륭한 작품이라고 누가 감히 단언할 수 있겠는가? 호불호는 오롯이 감상자의 취향에 달렸다.

객관적인 가치 판단이 무용해지는 예술 앞에서 어떤 이들은 이 미지의 영역에 대한 불확실성 때문에 무작정 회피를 택하기도 한다. 흔히 미술에 관한 질문을 건네면, “저는 예술에 대해 아는 것이 없어서요.” “잘 모르겠어요.”라고 답하는 사람을 많이 본다. 그때마다 미술학도로서 안타까움을 느끼곤 한다. 그에게 던진 것은 딱히 정답을 바라는 질문이 아니었다. 그저 한 사람의 자유로운 감상을 듣고 싶었을 뿐인데, 한마디 말에 혹시라도 예술에 대한 무지가 들통이 날까 두려워한다니. 예술만큼 지식이 절대적인 힘을 갖지 않는 학문이 또 어디에 있단 말인가? 아무것도 몰라도 만들 수 있고, 감상할 수 있기에 예술인 것이다. 그러나 몇몇 사람들은 예술에도 시험처럼 점수를 주는 기준과 배경지식이 필요할 것이라는 오해를 하고 있다. 그리고 이 오해 때문에 평생 예술과 자신 사이에 장벽을 세운다. 

필자는 이 오해의 대표적인 원인 중 하나로 미술 교육과정을 꼽고 싶다. 초등학교부터 미술 교과가 공식 과목으로 채택되어 12년간 교육되고 있긴 하지만, 실상 학생들이 이에 긍정적인 영향을 받아 예술에 대한 인식을 넓히는지는 모호하다.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예술에 대해 배우지 못한 채, 창작 실습이 선행되기 때문이다. 결과물에 점수가 매겨지는 경험이 반복되면 학생들은 자연스럽게 높은 점수를 받는 정답에 가까운 결과를 만들어내려 한다. 미술은 잘 그려야 하는 과목이 되고, 기술적으로 능숙하지 못한 학생은 쉽게 좌절을 경험한다. 아이들은 미술에 대해 소극적 심리를 가지게 되고, 미술에 관한 대화를 두려워하는 어른이 된다.

우리가 왜 예술에 대해 배워야 하는지를 생각하면, 이는 모순적인 점이 있다. 미술 교과 교육과정의 초기부터 항상 강조됐던 키워드는 ‘창의성’인데, 사전적 의미로 ‘새로운 것을 발견하거나 기존에 있던 생각이나 개념들을 새로이 조합해 내는 특성’이다. 그러나 미술 교과의 교육 방식은 수학, 과학과 같은 이론 과목과 크게 다르지 않은 체계로 운영되어 왔다. 기법에 대해 교육하고, 학생의 결과물을 점수로 매겨 차등을 정한다. 완성도가 높은 작품에는 가산점이 부여된다. 여기에는 그 어떤 창의성도 끼어들 여백이 없다. 새로운 시도는 오히려 실패처럼 보인다. 다른 것을 생각하고 말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데 이게 어떻게 효과적인 미술 교육이란 말인가? 사실상 특정 기술을 익히는 ‘도제 교육’에 더 가깝게 보인다. 물론 점차 평가 방식이 변화되며 실기력이 아닌 사고 과정을 보는 세부적인 채점이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이런 수행평가는 사고방식 자체를 감시당하는 기분을 안겨주어 미술에 거부감을 일으키는 또 다른 문제를 낳는다.

우리가 미술 수업에서 기대해야 할 것은 특기 양성과 학생부 자료 기록, 지식 상승이 아니라 무언가를 다르게 생각해 보는 마음가짐이 아닐까? 다른 사람의 작품을 바라보고 감정을 느끼고, 스스로를 표현해 보는 경험 말이다. 어쩌면 미술의 순기능은 공감 능력을 키우고 사회를 윤활하게 만드는 것일 테다. 그러기 위해서는 미술 교육이 ‘실행자’가 아닌 ‘감상자’에 좀 더 초점을 두어 전개되어야 한다. 미술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보고, 사고방식을 교육해야 비로소 그 의의가 제자리를 찾는다.

이는 교과 과정에 한정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국내 미술관에서 서문을 읽거나 오디오 가이드를 접하다 보면, 간혹 작가의 작품이 아닌 배경을 과다하게 서술하거나 감상자가 어떤 감정을 느껴야 하는지 제시하는 경우도 있다. 미술관은 단순한 지식 정보를 전달하는 기관이 아니라 시각적 정서를 함양하고 소통하는 곳인데, 마치 강의를 듣고 정답을 찾아야 하는 것 같은 부담감을 가진다. 마치 시험지 위에 쓰이던 점수처럼 객관적 지표를 찾게 되는 것이다. 이 현상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감상자에게 달리 생각할 가능성과 해석의 자유를 보장해야 한다. 이러한 포용적 태도만이 진정한 예술을 즐기게 만든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가 처음 미술을 접할 때 배워야 할 첫 번째이자 마지막 지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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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 현